한국 소설이 장편(長篇)의 계절을 맞았다. 본격 문학 작가들이 최근 이색 소재와 서사를 갖춘 장편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경남 한산도(閑山島)에 사는 중진 작가 유익서는 전통 옻칠 공예의 미학을 다룬 소설 '세 발 까마귀'(나무옆의자)를 냈다. 지난 몇 년간 장편소설 공모에서 연거푸 당선된 젊은 작가 장강명은 요즘 한국 청년들의 현실 비판을 반영한 '한국이 싫어서'(민음사)를 내놓았다. 유익서 소설이 한국적 미학에 애정을 표현한 반면 장강명 소설은 한국적 삶에 환멸을 표출했다는 점에서 묘한 대조를 이룬다.

스페인 문학자 구광렬(울산대 교수)은 1980년대 멕시코 감옥에서 시작하는 소설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새움)를 출간했다. 젊은 작가 김조을해는 가상세계의 수용소를 그린 소설 '힐'(북인더갭)을 선보였다. 해외를 무대로 하거나 판타지를 상상하는 것은 요즘 한국 소설의 새 흐름이기도 하다. 구광렬 소설에서 멕시코는 현실 공간이면서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가상 도시처럼 남미 현대사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김조을해 소설은 환상 문학이면서도 오웰의 소설 '1984'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계보에 속한다.

왼쪽부터 새 장편소설을 출간한 작가 유익서, 장강명, 구광렬, 김조을해.

유익서의 '세 발 까마귀'는 경남 통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예술가 소설이다. 옻칠 공예를 현대 미술에 응용해 세계 미술 시장에 내놓을 한국적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서양 미술은 중세를 정점으로 미학적 아우라를 점점 잃어오지 않았는가"라며 현대 미술을 비판한 뒤 "옻칠과 자개의 특성을 살려 벽화의 전통을 구현하자"고 제안한다. 작가는 "전통의 계승은 풍요로운 샘"이라고 강조했다.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 주인공은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라고 자조하는 오늘의 청춘을 대변한다. 주인공이 호주로 떠나 고생 끝에 정착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결국 한국적 삶에 안주하지 못해 호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다. 작가는 행복을 '자산성 행복'과 '현금 흐름성' 행복으로 나눈다. 취업을 비롯해 현실에서 성취를 이룬 사람은 그로 인한 기억을 행복의 자산으로 삼아 힘들게 생존한다. 그런 성취의 기억이 없는 사람은 순간순간의 행복을 끝없이 추구하는 '현금 흐름성' 행복을 지향하게 된다. 한국에선 '현금 흐름성' 행복을 얻기가 힘들다는 게 이 소설의 전언이다. '집 사느라 빚 잔뜩 지고 현금이 없어서 절절매는 거랑 똑같지 뭐'라고 주인공이 한마디 날리며 한국을 떠난다.

구광렬의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는 멕시코 감옥에 억울하게 갇힌 한국인 유학생의 인생 유전을 다룬다. 주인공이 지옥 같은 감옥에서 탈출한 뒤 멕시코 반란군에 합류해 겪는 모험담이다. 작가가 멕시코 유학 체험을 바탕으로 원래 스페인어로 쓴 소설이다. 출간을 하려 했으나 원고를 잃어버렸다가 기억을 되살려 우리말로 복구했다고 한다. 한국과 남미의 정치적 유사성을 반영하며 쓴 분노의 소설이기도 하다. '어떤 일을 할 것,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라는 칸트의 행복론을 인용해 소설 주인공이 파란만장한 모험에 뛰어든 동기를 에둘러 표현한다.

김조을해의 '힐'은 시대와 장소가 불분명한 가상현실을 담은 환상적 리얼리즘을 펼쳐놓는다. 정체불명의 제국(帝國)이 인간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교화하기 위해 세운 수용소를 무대로 삼았다. 수용소 같은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을 찾아가려는 이야기다. 그 밑바탕엔 분단된 한반도에서 원초적 고향을 찾으려는 '실향민 의식'이 깔려 있다. 작가는 황해도에서 월남한 조부를 둔 피란민 3세대라고 한다. 분단과 전쟁 이전의 고향을 향한 실향민 가족의 무의식이 이 소설의 뿌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