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지난 5일 독일 본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19세기 일본 산업 시설 23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려고 한국인 강제 징용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일본이 국제회의에서 '자기 의사에 반한 한국인의 징용과 강제 노역'을 시인한 것은 처음이다. 그러지 않으면 아베 정권이 추진해 온 세계유산 등재가 무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토 구니(佐藤地) 주(駐)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이날 회의에서 영어로 발표한 일본 정부 입장에서 "1940년대 일부 시설에 수많은 한국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했다(forced to work)"라고 밝혔다. 애초 한국 정부는 '강제 노역(forced labor)'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의 반대에 부딪혀 이렇게 풀어 쓰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이 시설의 유산 등재가 확정된 직후 "강제 노역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가 내놓은 일어(日語) 번역본에도 '강제로 노역했다'가 아니라 '일하게 됐다'로 돼 있다고 한다. '한국인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라는 구절이 엄연히 있는데도 단어 하나를 갖고 전체를 왜곡하려 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앞으로도 '강제 노역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 가능성이 작지 않다. 일본은 애초 이 시설을 세계유산으로 신청할 때부터 강제 징용 사실을 숨기느라 등재 대상 시기를 1850~1910년으로 못 박기도 했다.

이번에 세계유산에 오른 일본 내 산업 시설 23곳 중 7곳은 조선인 5만8000명이 강제로 끌려가 94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하시마 탄광 같은 시설은 한번 끌려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다고 해서 '지옥섬'이라고 불렀다. 아베 총리가 그간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해 "침략의 정의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는 주장을 펴 왔던 점에 비춰보면 국제회의에서 스스로 밝힌 일본 정부 입장까지 왜곡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한·일은 일본 시설의 유네스코 등재를 놓고 외교 전면전을 벌여왔다. 가장 인접한 이웃 나라끼리 상대국의 유산 등재를 놓고 찬반 다툼을 벌였다는 자체가 비정상이고 양국 관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베 정권이 이번처럼 상황을 바꿀 계기를 만들고도 그걸 되레 불신을 키우는 원인으로 만드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 한 진정한 한·일 관계 정상화는 요원한 과제다.

[사설] 복지 포퓰리즘이 타락시킨 그리스의 자포자기
[사설] 사학연금법 개정, 공무원연금처럼 국민 속 끓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