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가와 히데코 제공

고등학생인 둘째 아들은 어려서부터 국수를 좋아했다. 식도락가 아저씨라도 된 양, 사철 내내 제철 국수를 달라고 한다. 여름이면 물냉면이나 일본 냉국수(히야무기·冷麥) 혹은 중화 냉면을 주식으로 먹는다. 아침잠이 부족한 내가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 따끈따끈한 밥과 된장국을 차려 줘도 "이런 거 말고 국수 해줘"라며 수저도 들지 않고 학교에 가 버린다. 가히 '국수 킬러' 수준이다.

둘째를 위해 냉장고에 떨어지지 않도록 비축하는 상비군이 '히데코표 쓰유(つゆ·다시마와 가다랑어로 만든 육수에 간장, 청주, 미림, 소금으로 간을 한 국물)'다. 쓰유는 주로 소바(蕎麥·메밀국수·사진)를 먹을 때 필요하지만, 나의 주방에서는 소면, 우동, 메밀국수 등 여러 종류의 면을 만나 각양각색 국수로 변신한다. 구운 김이나 오이채, 지단을 얹으면 5분 만에 완성된다. 나만의 쓰유는 진간장을 넣어 새까맣고 진한 도쿄식 쓰유와, 소금으로 간을 맞춰 연한 오사카식 쓰유의 중간쯤 맛을 낸다.

일본에 살 때는 소바의 참맛을 몰랐다. 20년 전 유럽에 살며 선택의 여지 없이 파스타를 먹다가 메밀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일본 메밀국수 조리법은 간단하다. 면을 삶아 준비하고 대파는 썰고 무는 간다. 김을 구워 직사각형으로 썬 뒤, 팩에 든 생고추냉이를 곁들인다. 일본 식당에서 김이 올려진 소바를 먹고 싶으면 자루소바를, 김이 없는 소바를 원할 때는 모리소바를 주문하면 된다. 참마나 산마가 있으면 강판에 갈아 국물에 섞어도 좋다. 참마와 산마 간 것을 도로로라고 하는데, 도로로와 메밀의 구수한 향은 더할 수 없이 궁합이 잘 맞는다.

일본에서 메밀을 면으로 뽑아 국수로 먹게 된 것은 16세기 말이었다. 조선의 원진 스님이 메밀가루에 밀가루를 섞어 면으로 뽑는 조리법을 전해줬다. 8세기 나라 시대만 해도 메밀은 가난한 농민이 기아 대비용으로 보관해 두던 잡곡에 지나지 않았다. 소바는 17세기 중반 이후가 되자 에도(지금의 도쿄)를 중심으로 빠르게 보급됐다.

일본에서 소바는 여름에만 먹는 음식이 아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가족끼리 도시코시소바(年越蕎麥·해 넘기기 메밀국수)를 먹는 풍습이 있다. 가늘고 긴 소바면으로 장수를 기원하고, 그해 힘들었던 일을 끊어낸다는 의미가 있다.

1994년 한국에 와서 냉면을 알게 됐다. 서울 을지로 남포면옥에서 처음 먹어본 물냉면은 기존에 알던 어떤 음식하고도 달랐다. 놋쇠로 된 그릇을 보고 한 번 놀랐고, 몸이 차가워지는 신선한 느낌에 한 번 더 놀랐다. 소고기 육수, 단맛을 내는 배, 매콤한 겨자가 오묘하게 어우러지다가 그 모든 맛을 중화해주는 달걀을 만나 합체가 됐다. 얼음 띄운 국물에 소면을 찍어 먹는 일본 냉국수나 자루소바로는 맛보기 어려운 시원함까지 있었다.

한국에는 물냉면 외에도 동치미 국수, 초계탕, 콩국수 등 차가운 국수 요리가 많다. 여름 무더위를 극복하는 오랜 지혜다. 일본에만 가면 소바가 먹고 싶어지는데, 한국에 오면 그다지 당기지 않는다. 혀도 장소에 따라 변하는 것일까. 내가 마시는 한국 공기와 한국 물, 나를 둘러싼 한국의 온도, 습도, 냄새에 맞게 '한국의 혀'로 변신했나 보다. 올해 여름도 남포면옥의 물냉면, 차가운 열무김치와 참기름으로 간편하게 만든 열무비빔국수로 시원하게 넘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