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학교에 다니는 조모(25)씨는 요즘 친구와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게 고민이다. 서로 "나는 아무거나 먹어도 되니 네가 골라라"며 선택을 미루는 통에 학교 앞 식당 거리를 두세 번 돌아다닌 적도 많다. 조씨는 평소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사다리게임'을 해 메뉴를 고르다 최근에는 한 음식 배달 어플 서비스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어플이 무작위로 메뉴를 추천해주는 기능이다.

대학교 4학년 배모(23)씨는 최근 온라인 쇼핑몰에서 옷을 사는 재미에 푹 빠졌다. 배씨가 '애용'하는 쇼핑몰은 셔츠·청바지 등 옷의 종류와 치수만 선택하면 해당 액수보다 비싼 옷을 무작위로 보내준다. 업체가 재고품을 저렴하게 처분하는 '복불복 이벤트' 서비스다. 1만원을 내면 2만원짜리 옷을 디자인과 소재에 무관하게 보내주는 식이다. 배씨는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을 때 차라리 선택을 쇼핑몰 쪽에 맡겨버리는 편"이라 했다.

옷 종류·크기만 알려주면 쇼핑몰이 디자인 골라 배달
뭘 먹을지 앱이 자동추천… 식당 메뉴판엔 '아무거나'
고백할까요? 말까요? 앱이 SNS 이용해 조언

최근 20·30대를 중심으로 생활 속에서 내려야 할 결정을 다른 사람이나 기계에 맡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른바 '결정 장애족(族)'으로 불리는 젊은이들이 늘면서 이들을 겨냥한 이색 마케팅도 성행하고 있다.

최근 유행하는 배달 어플은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 모르는 고객을 위해 '아무거나' 서비스를 도입했다. 서울 강남과 홍익대 근처 번화가엔 안에 어떤 물건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선택하는 '럭키박스'만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가 생겼다. '아무거나'라는 선택지를 메뉴판에 적어 놓은 식당도 늘고 있다. '복불복 이벤트'를 하는 한 패션 쇼핑몰 관계자는 "전체 매출의 10% 정도는 이 같은 랜덤 이벤트를 통해 나온다"고 했다.

뭔가 결정할 때 다른 사람 조언을 얻을 수 있게 연결해주는 어플도 생겼다. 한 신생 벤처 기업이 '결정 장애 해결'을 목표로 만든 어플 '쏘캣'은 질문자가 선택지를 두 개 올리면 SNS 기능을 통해 다른 이용자들이 간단한 이유와 함께 한 가지를 골라준다. 이 어플엔 출시 약 100일 만에 '어떤 지갑을 살까요?' 같은 물건 고르기부터 '고백을 해야 할까요? 말까요?' 같은 연애 문제까지 5000개에 가까운 질문이 올라왔다.

젊은 세대의 결정 장애는 사소한 신변 사항을 넘어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도 나타나고 있다. 새누리당의 싱크탱크 여의도연구원 산하 청년정책연구센터가 최근 전국 20대 청년 5281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부모가 본인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끼친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의 54.5%에 달했다.

최근 대학을 졸업한 김모(27)씨는 사기업과 공기업을 놓고 저울질하다 결국 "안정적인 게 최고"라는 부모 말에 따라 공기업 시험을 준비 중이다. 젊은 여성들이 자주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엔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 좀 골라 달라' '아이 보낼 학원 좀 골라 달라'는 등 타인에게 선택을 문의하는 글들이 하루에도 수십개씩 올라온다.

젊은 세대에서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두고 '결정 장애 세대'란 책을 낸 독일의 올리버 예게스는 "과거보다 너무 많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면서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병적으로 모든 결정을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의 경우 부모 영향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부모의 과도한 개입 아래에서 자라면서 '선택의 경험'이 부족해 성인이 돼서도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럭키박스를 구매하면 원치 않는 물건을 받을 때가 더 많은 것처럼 젊은이들이 기계나 타인의 결정에 의존하다 보면 직·간접적인 비용을 지불하게 되고 '결정 장애'가 증가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