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앞에 회색 승복을 입고 밀짚모자 쓴 한국 스님 40명이 나타났다. 일행 가운데는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도 있었다. 이들은 절벽 수도원으로 유명한 메테오라 수도원, 에페소스의 초기 그리스도교 유적도 방문했고 그리스정교회 80대 수사(修士)와도 만났다. '스님들이 왜 그리스도교 유적을?'이란 의문이 들지만 이 여행은 조계종 교육원(원장 현응 스님)이 마련한 정식 연수 코스. 이 연수를 기획한 교육국장 진광(47) 스님은 "스님들이라고 맨날 인도, 중국, 동남아만 다니란 법 있느냐"고 했다.
진광 스님은 10여년간 세계 100개국을 배낭여행한 베테랑 여행가. 출입국 스탬프, 비자 찍을 자리가 모자라 여권 바꾼 것만 3번째다. 그가 해외여행에 눈뜬 건 1998년 여름. 1994년 수덕사로 출가해 1997년부터 선방(禪房)을 다니며 수행한 그는 1998년 해인사에서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인도로 두 달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사기도 당하고 귀인(貴人)도 만나면서 부처님 8대 성지를 순례한 그에게 세상은 또 다른 선방(禪房)이었다. 이후 안거가 끝나면 배낭을 꾸려 짧게는 한 달 반, 길게는 반년씩 전 세계를 떠돌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해 북구와 동구, 그리고 터키, 이란, 파키스탄, 중국까지 육로로만 다니기도 했고, 멕시코에서 페루, 칠레까지 중남미 대륙을 위아래로 훑기도 했다. 현지 종교시설을 찾을 땐 그들의 예법을 따라 해보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그가 2012년 조계종 교육원 연수국장을 맡으면서 '교육 프로그램'으로 발전했다. 시작은 경주 남산. "스님들도 의외로 경주 남산을 안 가본 분들이 많습니다. 2박 3일 동안 남산과 경주를 순례하는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죠." 이후 익산, 부여, 공주 등 백제문화권을 거쳐 2013년부터는 인도, 중국, 일본, 그리고 실크로드 등의 불교 성지로 범위를 넓혔고, 지난 봄 드디어 그리스·터키 순례까지 기획하게 된 것.
그는 "처음 그리스·터키 순례를 이야기했을 때 스님들도 '거긴 절도 없는데 왜?'라고 했다"며 "신자들은 전 세계를 누비는 마당에 정작 스님들이 불교 성지 순례라는 좁은 테두리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순례든 여행이든 결국 돌아오기 위한 것입니다. 종교란 결국 인간에 대한 서비스인데 여러 종교를 겪어보면 길은 다 달라도 결국 목적지는 하나가 아닐까요. 많은 스님이 그런 경험을 얻기 바라는 마음에서 다른 종교의 성지 순례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 9박 10일 일정으로 정우 스님(조계종 군종교구장)을 비롯한 스님 50여명과 함께 동티베트의 불교 유적을 순례하는 그는 "앞으로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의 가톨릭 수도원과 이집트, 이스라엘의 그리스도교 성지 순례도 기획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