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선임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표시하며 '볼모' '배신' '압박' 같은 단어로 5분간 정치권을 질타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본 것 같았다. 출신 배경과 교양, 이념 진영에서 완전히 다른데도 서로 닮을 수가 있는 것이다.

두 대통령 모두 대다수 여론에 맞서 "그건 당신네 생각일 뿐"이라며 '마이웨이'를 외쳤다. 양보 없는 정면 대결을 벌이는 스타일도 닮았다. 집권 기간 내내 난민촌 같은 어수선한 나라 풍경이나 국정 슬로건은 떠들썩하게 난무하는데 실제 이뤄진 건 없는 것도 비슷하다. 게다가 "언론은 대통령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는 골수 지지층이 둘러싸고 있는 것도 그렇다.

노무현은 '좋은 정치인'이었는지는 모르나 '성공한 지도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대통령 못 해먹겠다"는 노무현의 길을 따라가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바깥으로 감정을 쏟아내기보다 좀 더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라가 이 모양인 것이 민생 법안을 통과시켜 주지 않은 국회 책임이라고 했지만 대다수 국민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 능력에 더 실망하고 있다. 과연 정부가 정상적인가에도 의문을 갖고 있다.

현 정권의 장관들은 인사청문회에서 간신히 살아남고 나면 그 뒤로 역할이 끝나는 것 같다. 메르스 파문 때 보건복지부 장관의 대통령 '대면(對面) 보고'는 최초 확진 환자 발생 이후 6일 만에 이뤄졌다. 매주 화요일 정기적으로 열리는 국무회의에서였다. 다시 8일 뒤 '메르스 대응 긴급 점검회의' 때 영상회의로 한 번 더 했다. 청와대 측은 "비서실에서 서면과 유선(有線)으로 보고를 계속 받아왔다"고 말했다.

장관은 정부 직제상 채워놓는 것일 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처럼 됐다. 어떤 사건이 생겨 구설수에 오른 장관이 아니면 그런 장관들이 있는 줄 국민도 모른다. 당초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을 고른 인사 실패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통령이 뽑아놓은 장관을 '장관'으로 써먹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장관은 국정 파트너가 될 수도 있고, 시종(侍從)이나 환관·주사·허수아비가 될 수도 있다. 지금 대통령은 주요 정책이나 현안이 생겨도 주무 장관을 따로 불러 의견을 구하는 것 같지 않다. 장관이 자신의 부처에서 재량권과 고위직 인사권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대통령의 의중을 읽는 청와대의 몇몇 비서관에게 "그렇게 진행해도 되겠느냐?"며 추인받는다고 한다. 공무원들은 권력 동향에 빠르다. 청와대로 보고서만 올리고 대통령과는 직접 만날 수 없는 장관을 어떻게 볼지는 뻔하다.

어떤 경우 대통령이 대면 보고를 받는 것은 '주무 장관으로 앞에 나서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전하는 행위다. 그 장관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메르스 초기에 주무 장관과 수석비서관, 질병관리본부장 등을 직접 불러 보고를 받았다면 대통령은 지금 같은 상황에 몰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빠른 판단이 가능했고, 지시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장관을 단지 '보고서'를 올리는 용도로 쓰면 국민도 그런 장관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여론으로부터 '대통령이 책임지고 나서라. 대통령은 뭐 하고 있나'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결국 뒷북을 치듯 움직이고, "동대문시장에서 상인들 환호 속에 대통령이 손을 흔들었다"는 식의 상황까지 연출됐다.

지난해 세월호 사건 처리도 주무 장관이 아닌 대통령이 팽목항에서 피해자 가족들과 직접 만나 "특검을 통해서라도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한 발언에서 어긋나게 됐다는 분석이 있다. 그 뒤 대통령의 말은 주워 담지 못했다. 피해자 가족들이 장관과 총리는 상대하지 않고 오직 대통령만 상대하겠다고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허수아비'가 된 해양수산부 장관은 국가 정책 결정에 참여하지 않고 팽목항에서 유족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몇 달 동안 수염을 깎지 않고 지냈다. 그런 노력은 눈물겨우나 장관의 역할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가능하면 매일 사람들을 불러 저녁을 함께하며 세상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이는 대통령의 직무라고 할 수 있다. 스타일상 그게 어렵다면 근무시간이라도 장관과 비서진과 얼굴을 맞대고 논의해야 한다. 국·과장급 공무원들도 가끔 부르고, 청와대의 젊은 비서관들만 따로 불러 일주일에 한 번씩 의견을 들어보면 더욱 좋다. 대통령의 의중에 맞춰주는 몇몇 비서는 정신 건강상 필요하지만, 본인이 생각지 못한 부분을 말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국정 운영 능력과 현장 감각에 도움이 될 것이다.

국민들은 점점 대통령에게 지쳐가고 있다. 대통령 비판은 일상사처럼 됐다. 그래도 또 쓰는 것은 대통령의 역할이 너무 중요하고, 아직 임기가 절반 이상 남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