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현 수필가

아내는 나의 페이스북 친구다. 하지만 단 한 줄의 글도 올리지 않던 사람이 한번은 내게 물었다. "○○○이라는 분과 친한가 봐요?" 나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아내가 답하기를 "당신이 그 여성분 글에 올린 댓글을 봤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녀와는 문학회 활동을 같이 하며 가볍게 아는 정도일 뿐인데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내뿐만 아니라 누구든 나에 대해 알려고 한다면 페이스북을 통해 내가 누구와 가깝게 지내는지, 내 생각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 후 나는 여성의 글에는 댓글을 거의 올리지 않는다. 아니 댓글 자체를 피하고 숨는다.

유행과는 거리가 먼 내가 스마트폰만큼은 남들보다 일찍 장만했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난 얼마 후 트위터에 가입했다. 어느 늦은 밤, 가수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들으며 트위터에 이 노래를 듣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잠시 후 어느 여인으로부터 댓글이 올라왔다. '어머, 이 밤에 어울리는 노래군요. 감상적이시네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트위터에 올린 자기소개뿐 사진도 올리지 않았으니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재미를 더한 것 같았다. 내가 글을 올리면 가끔 여러 사람이 리트윗한다. 한번은 호기심에 리트윗한 사람들의 팔로어를 세어 보니 수만명에 달했다.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140자의 문자에 박수를 치며 "이제 소통의 시대가 왔다"고 환호했다.

때로는 정치 이슈에 관한 글을 올리거나 다른 사람 의견에 반대하는 글을 올리면서 트위터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 퍼뜩 한 줄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 팔로어 중에는 나를 잘 아는 사람도 많다, 회사에 다닐 때 트위터를 시작했으므로 이전 직장 사람들도 있고, 다른 지인들도 있는데 이들에게 나의 정치적 성향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 아닌가, 그중에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낯모르는 이들과의 소통에 나는 여전히 재미를 느꼈다.

트위터를 시작한 지 2~3년이 지나 어느 신문 기사를 읽으며 트위터에 대한 나의 즐거움은 시들해졌다. 미국에서는 이미 기업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그 사람의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를 검색해 정치·사회·문화적 성향을 파악하고, 그 자료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가슴 한쪽에 약간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청년실업이 커다란 사회문제다. 내 자식이 대학 졸업할 때가 가까워 오는데 그동안 정치에 관해 트위터에 올린 내 글을 어느 누군가 읽었을 것이다. 혹시나 아들이 지원하는 회사의 채용 담당자나 책임자들이 나와 생각이 다를 경우, 기우이겠지만 아들 녀석의 취업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지 걱정이 들었다. 이미 이 사회는 내가 보지 않더라도 촘촘하게 그물이 쳐져 있어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세상 정치에 관한 의견을 올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트위터를 멀리하게 되었다.

전 세계적인 트위터 열기가 정점을 찍을 무렵, 페이스북이 돌풍을 일으키며 새로운 소통의 길을 열었다. 페이스북은 일차적으로 지인들끼리 공유하는 소통의 장이다. 그러나 지인만으로는 소통의 폭이 좁으므로 지인의 페이스북 친구(페친)를 내 페친으로 삼기도 한다. 선배 한 분은 뛰어난 머리와 글재주, 해박한 지식으로 엄청난 수의 페친을 만들어 오프라인에서도 상당한 대접을 받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올린 글이나 사진에 댓글이 많이 올라오기를 기대한다. 페이스북에서는 자신의 좋은 면만 보여준다. 타인의 비판도 없다. 쌍방향 같지만 철저한 일방통행의 반쪽짜리 소통이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1946년에 쓴 소설 '1984'에서 텔레스크린을 언급했다. 가정집과 공공장소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전체주의 권력은 개인의 행동·대화·표정·숨소리 등 모든 사생활을 24시간 감시한다. 권력은 개인의 생각과 행동, 심지어 기본 욕구인 성욕(性慾)까지 통제한다. 그러나 현대인은 70년 전 조지 오웰의 머리를 뛰어넘어 자기 스스로를 감시하게 한다. 경쟁 속에 사는 대중은 늘 소통에 목말라한다. 그래서 자기를 일부러 드러내 인정받고 싶어 한다. 자신의 속과 내장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줄 알면서도 SNS에 글을 올리고 또 올린다.

지하철역에서 승객 간 몸싸움 장면이 스마트폰에 찍혀 인터넷에 돌 경우 '화면 속 가해자'의 신상은 네티즌 수사대에 의해 상세히 공개된다. 현실에선 피해자인데 화면상 억울하게 가해자로 둔갑된 경우인데, 그가 SNS나 인터넷상에서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신상은 공개되기 어려울 것이다.

자칫 실수 한 번에 모든 정보가 공개돼 자신의 삶이 무너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부나비처럼 꾸역꾸역 SNS의 그물로 다가간다. 나 또한 그간의 생각을 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SNS에 접속해 오늘도 손가락을 바삐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