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삼희 논설위원

메르스 사태 같은 위기 상황에선 전 국민이 힘을 합쳐 자기 위치에서 할 일을 해내야 한다. 그러자면 정부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정부가 국민에게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주고 국민이 해야 할 일들을 요구해야 한다. 이런 리더십이 먹혀들어 가려면 국민이 ‘정부가 상황을 장악하고 있고 정부 말대로 따라가면 위기가 해소될 것’이라고 신뢰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정부의 ‘메시지 관리’다. 메르스 사태 초기 정부의 실책은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데 급급해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을 남발해버렸다는 점이다. 첫 환자가 발생했던 지난달 20일과 두 번째, 세 번째 환자가 나온 21일 언론 브리핑에 나선 사람들은 양병국 질병관리본부장, 권준욱 복지부 공공보건정책관, 안명옥 국립중앙의료원장 등이다. 이들은 “많이들 우려하시는데 메르스의 전염력은 대단히 낮다” “일반 국민에게 전파 가능성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가 보호해준다” “1차·2차·3차로 가면서 감염력은 떨어진다” “3차 감염은 우려할 사항이 아니다”고 했다. 26일 다른 병실에서도 확진 환자가 나오자 이번엔 “지역사회 전파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고 했다. 29일 중국 출장한 40대가 감염자로 확인되고 환자가 본격적으로 늘던 상황에선 복지부 장관이 “개미 한 마리라도 지나치지 않겠다”고 했다. 이달 2일 3차 감염자가 나왔을 때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 관계자는 “지역사회 확산은 당연히 절대 아니다”고 했다. 메르스 환자는 첫 환자 입원 병실에서 같은 병동 다른 병실로, 이어 다른 병원들로 계속 확산돼갔다. 방역당국이 ‘다음 단계의 확산은 없을 것’이라고 했던 말들은 차례차례 허풍, 허언(虛言)이 돼버렸다. 당국의 권위(權威), 신뢰(信賴) 자산은 허물어졌다. 간단한 사고실험을 해보면 당국자들의 선택지는 네 가지다. (A-①) 방역당국은 ‘큰일 벌어질 수 있으니 대비하자’고 했지만 실제는 아무 일 안 벌어졌다. 방역당국은 과잉 대응했다고 비난받는다. 국민에게 큰 피해는 없다. (A-②) 당국이 ‘큰일 벌어질 수 있다’ 했는데 실제 큰일이 벌어졌다. 국민 피해가 컸지만 당국자들에게 책임 추궁은 없다. (B-①) 당국이 ‘별것 아니다’ 했는데 실제 별것 아닌 걸로 끝났다. 운(運)이 따른 결과일 수 있는데 당국은 별 비용 투자 없이 선방했고 국민은 만족한다. (B-②) 당국은 ‘별것 아니다” 했는데 실제는 큰 사태로 발전했다. 당국자들은 국민 분노에 직면한다. 깊게 생각해볼 것도 없이 B-② 상황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 우리 방역당국은 B-①을 기대하면서 “별것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입력시키려 들었다. 좀 더 멀리 보는 훈련이 안 돼 있고, 전망(展望)에 희망(希望)을 섞어 버리는 판단 착오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이다. 중간 수준 관리자급(級)에서 흔히 확인되는 성향으로 ‘축소(縮小) 지향성’이 있다. 작년 3월 ‘가습기 비극, 4년 방역 허송(虛送)만 없었더라도’라는 칼럼에 썼던 내용이다. 2007년 연말 서울의 빅4 병원 소아호흡기 교수들이 모였다. 3년째 겪는 정체불명의 영·유아 폐렴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거기에 질병관리본부 K과장도 초대됐다. 모임에선 괴(怪)질환 원인에 대해 결론을 못 냈다. ‘더 관찰해보자’는 정도로 의견을 모았다.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이라는 결론은 2011년 5월 질병관리본부가 정식 역학조사에 착수한 후 석 달 만에 내려졌다. 만일 2007년 모임에 참석했던 K과장이 사명감을 갖고 달라붙었다면 수백 생명을 구해냈을 수 있다. 메르스 사태를 보면서 K과장 같은 소극적, 축소 지향적 멘털리티가 방역 조직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