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과학계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실명(實名) 비판이 부활했다. 포문을 연 주인공은 사회학자 김경만(57·사진) 서강대 교수. 그는 최근 출간된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문학동네)에서 김경동·한완상·조한혜정 같은 원로·중견 학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원로 사회학자인 김경동(79) 서울대 명예교수의 저서 '현대 사회학의 쟁점'에 대해 "대부분 외국 학자가 이미 정리해놓은 이론을 '또다시' 정리하는 형식을 취한다"면서 "(외국의) 교과서에 의거한 김경동의 이론 소개가 때로는 무슨 소리인지 모를 만큼 간략해 논의 수준이 깊지 않다는 것 또한 문제"라고 비판했다. 김경동 교수의 민속방법론 이해에 대해서도 "서양 이론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깊이 있는 독해는커녕 그야말로 '소화도 되지 않은' 서양 이론들을 2차 문헌에 입각해 쭉 세워놓은 꼴 이상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민중사회학'을 주창한 한완상(79) 전 통일원 부총리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김경만 교수는 "사회학의 민중화에 대한 어떤 이론적 시나리오도 제시하지 못할 뿐 아니라 1991년 한국사회학회장 취임 연설 곳곳에서 오히려 '민중화'에 반(反)하는 모순된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의 비판에 따르면 "정작 그(한완상)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사회학 전문화'의 정수인 미국의 미시사회학 이론과 영국의 강단좌파가 생산해낸 고도의 추상적 이론을 아무런 수정 없이 '빌려 와서' 1990년대 한국 사회학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훌륭한 이론으로 칭송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경만 교수는 '탈식민적 글 읽기와 생각하기'를 강조했던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에 대해서도 "생각과 실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 없이 단순히 '성찰'과 '반성'을 통해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는 당위만 외쳐대면 한국 사회과학은 항상 똑같은 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해당 교수들의 반론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이처럼 김 교수가 선배 학자들을 실명 비판한 건 한국 사회과학자들이 내건 '한국적 이론'이 사실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론 때문이다. 서구 이론의 종속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많이 유학을 가고 종속성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한국 사회과학이 '외국 이론의 수입상'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국 저명 학술지에 계속 논문을 발표하고 서구 학자들과도 부딪치고 논쟁하는 등 세계 학계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김경만 교수는 1991년부터 서강대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는 미국·유럽의 학술지에 왕성하게 논문을 발표해왔다.

오는 19일 경상대에서 열리는 한국사회학회 주최의 사회학대회에선 김경만 교수의 실명 비판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린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강신표 인제대 명예교수가 발표자로 나서고, 김경만 교수도 토론자로 참석할 예정이어서 눈길을 끈다. 강신표 교수는 사전(事前) 제출한 발표문에서 "김경만의 '한국 사회학 비판'은 한국 사회학사에서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라고 높게 평하면서도 "상이한 학문 공동체에서 살아온 학자들의 의식 세계와 패러다임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