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 나이스 샷!'

녹색 잔디 위로 청명한 외침이 울려 퍼진다.

"제대로 갔어요? 잘 안 맞은 것 같은데."

스윙을 끝낸 유정일(47·시각장애1급·경기도 시흥)씨가 조문자(41·서울 관악구) 코치를 돌아보며 물었다. 조 코치는 "조금 급했는데, 공은 잘 갔어요"라며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달 28일 오전, 경기도 포천에 위치한 '베어크리크 골프클럽'에서 특별한 대회가 열렸다. 한국시각장애인골프협회(KBGA)가 주최하는 '(베어크리크배) 한국시각장애인골프대회'로, 벌써 9회째를 맞은 시각장애 골프 애호가들의 축제다. 전맹(全盲·B1) 선수와 약시(B2) 선수로 구분해 진행됐는데, 총 26명이 출전해 필드 위에서 자웅을 겨뤘다. 선수만 겨루는 게 아니다. 시각장애 선수들의 눈이 되어 주는 일명 '코치'가 일대일로 붙어 승부를 함께한다. 땡볕 아래서 일일이 선수의 공을 놔주고, 골프채의 방향을 알려주면서 세심하게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 심리적인 안정을 돕기 위해 경기 내내 '잘했다' '멋지다'는 격려가 끊이질 않는다. 양서연 한국시각장애인골프협회 총무는 "공을 치는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코치들은 정말 고생만 한다"면서 "모두 무보수 자원봉사자로, 직장에 휴가를 내고 대회에 참석할 정도로 열의를 보이는 분도 많다"고 했다.

보치아(B3)국가대표팀. 왼쪽부터 김준엽(36)선수와 이옥련(42)코치, 정호원(28)선수와 권철현(42)코치, 최예진(23)선수와 문우영(52)코치, 김한수(23)선수와 윤추자(55)코치.

◇장애인 스포츠의 숨은 조력자 '가이드러너'

지난해 열린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은 2위를 차지하며 장애인 스포츠의 역량을 과시했다. 이는 장애인 선수들의 땀과 노력에 더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그들의 손과 발이 됐던 조력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장애인 스포츠 분야에선 이들을 '가이드러너(Guide Runner)'라고 부른다. 시각장애 육상 선수를 이끌어 주는 도우미를 칭하는 용어였지만, 현재는 종목과 관계없이 장애인 선수들의 경기 참여를 돕는 비장애인들을 일컫는다. 수영 선수의 턴 동작을 돕는 '태퍼(tapper)', 장애인 사이클 선수 앞에 앉아 방향을 잡아주는 '파일럿(pilot)', 장애인 5인제 축구의 비장애인 '키퍼(Keeper)'까지, 역할이나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스포츠를 통한 '어울림'을 실현하려는 목적은 같다.

시각장애 골프 코치 역시 마찬가지다. 자원봉사자들로 이뤄지는데, 골프 코치 경력이 있는 사람부터 이제 막 골프를 배웠다는 지원자까지 다양하다. 한국시각장애인골프협회 관계자는 "주로 알음알음으로 섭외하는데 40~50명 정도 인력 풀이 있다"고 했다. 이번 대회에 선수로 참가한 주용환(59·시각장애 3급·경기 성남시)씨는 "선수가 상을 받으면 모든 공(功)은 선수에게만 가고 코치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참 열심히 한다"면서 "필드 안에서만 도와주는 게 아니라, 시작 전 준비를 하거나 식사를 할 때, 화장실에 갈 때, 심지어 귀가를 할 때도 봉사활동을 겸해준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우리나라의 시각장애인 골프 역사는 8년여 정도다. 40년을 넘어선 일본이나 호주, 미국 등에 비하면 이제 걸음마 수준이다. 대회에서 만난 장애인 선수들은 "시각장애인들은 게임 진행이 워낙 더디다 보니 기존 골프장을 이용하는 건 꿈도 못 꾼다"고 입을 모았다. 자유롭게 잔디를 밟을 수 있는 건 1년에 한두 번 이런 대회가 있을 때뿐이다.

이번 대회에서 1위(B1부분)를 한 유정일씨는 "1년에 두 번씩 일본 장애인 선수들과 교류전을 하는데 실력이 엄청나더라"며 "2020년에 일본에서 열리는 장애인올림픽에 골프가 정식 종목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는데, 코치들과 호흡을 맞춰 거기에 꼭 참가해보고 싶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스키 선수 황민규(왼쪽)씨와 전담 가이드 백단비씨가 균형잡기 연습을 하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골프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임동식(52)선수와 이희석(49)코치.
보치아(B3)국가대표 선수인 김한수 선수와 그의 코치 윤추자씨. 둘은 모자관계다.

◇기술보다 호흡이 중요… 장애인 알파인 스키 가이드러너

"눈을 감고 스키를 탄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마 보통 때보다 10배는 빠르게 느껴질 거예요. 제가 그렇거든요. 갑자기 몸이 뚝 떨어지는 느낌, 롤러코스터를 눈 감고 타는 기분이죠."

시각장애 스키 선수 황민규(19·시각장애 2급 추정·꿈나무 소속)씨의 말이다. 2m 앞도 분간할 수 없는 황씨가 어떻게 스키를 탈 수 있을까. '알파인 스키 가이드러너'(이하 가이드러너)의 존재가 이를 가능케 했다. 5~7m 정도를 앞서 나가며 선수의 시야를 대신 확보해 준다. 일반적으로 블루투스 무전기를 연결해 소통하는데, 워낙 속도가 빠르다 보니 '고' '슬로' '스톱' 등의 짧은 신호가 소통의 전부다.

사실 국내에선 불모지와 같았던 분야다. 정식 가이드단이 없어 장애인 스키 선수들의 체계적인 훈련은 꿈도 못 꿨다. 지난해 러시아에서 열린 소치 동계패럴림픽 알파인스키 부문에서 4위를 한 국가대표 양재림 선수도 가이드러너를 구하지 못해 코치가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김형관 코치(32·삼육대 스키가이드단)는 이 부분에 주목했다. 대한장애인체육회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삼육대학교에 가이드단 창설을 제안했고, 이 대학 생활체육학과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총장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지난 4월, 국내 대학 최초로 시각장애인 스키 가이드단이 꾸려졌다. 훈련에 대한 비용은 학교 측이 지원해주고, 참여하는 가이드러너는 모두 자원봉사로 이뤄진다.

지난 1일 방문한 삼육대(서울 노원구)에선 스키 가이드단의 지상 훈련이 한창이었다. 가장 눈에 띈 건 가이드단원 백단비(19)씨와 황민규 선수. 둘은 1m도 채 안 되는 줄을 서로의 팔에 묶고 함께 뛰고 있었다. 스키 자세 훈련을 할 때도, 균형 연습을 할 때도 둘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김형관 코치는 "장애인 스키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가이드러너와 선수 간의 호흡"이라며 "연습 과정부터 거의 '한 몸'이 되지 못하면, 시합 때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훈련을 지켜보던 이수영 감독은 "패럴림픽 알파인 스키 평가 항목에는 합숙 기간 가이드와 선수가 얼마나 잘 소통하고 서로를 챙겨줬는지도 포함된다"고 귀띔했다.

연습을 마친 황 선수에게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집에만 있지 않게 해줘서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꿈을 묻는 질문에는 주저 없이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스키에서 최초의 남자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가이드인 백씨의 목표는 뭘까.

"민규의 목표가 곧 저의 목표예요. 그 목표가 이뤄질 때까지 옆에서 힘껏 도울 겁니다."

◇무대 뒤편 조력자가 흘리는 땀, 선수의 가치를 높이다… 보치아 코치

"장애인 올림픽 같은 거 진행될 때 선수촌 식당에 가면 제일 찾기 쉬운 게 '보치아' 선수들이에요. 숟가락도 제대로 못 들 만큼 중증이거든요."

권철현(42·속초장애인체육회) 코치의 말이다. 권 코치는 벌써 14년째 보치아 선수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보치아(Boccia)는 오로지 장애인 대회에만 종목이 있다. 뇌성마비 장애인이나 기타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 스포츠인 셈. 방식도 단순하다. 표적을 정해놓고 그 방향으로 공을 던져 가까이 간 공이 많으면 이기는 경기다. 동계 종목인 컬링(curling)과 흡사하다. 우리나라에선 2006년 대한장애인보치아연맹이 창립되며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지난 2008년 베이징 장애인올림픽에서 두 종목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강국 반열에 올랐다.

지난 1일 오후, 경기도 이천의 장애인체육종합훈련원에서는 네 선수가 둘로 나뉘어 연습 중이었다. 이들은 모두 'BC3' 종목의 선수. 보치아 종목은 BC1부터 4까지 나뉘는데 숫자가 높을수록 장애 정도가 심하다.(4급은 非뇌성마비) 3급 선수들은 모두 최중증 장애를 가진 선수들로, 보행은 물론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정도다. 권 코치 같은 보조인이 필수적인 이유다.

권 코치가 "오전 훈련을 방금 마쳤다"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의 손 군데군데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날 오전, 선수가 쓸 빨간색 공에 알코올을 먹이고, 사포로 다듬고, 수십 번 굴려보던 과정이 '빨간 손'의 정체였다. 이미 10년째 해온 일이다.

"다른 종목과 다르게 보치아는 장애에 맞춰 장비를 만들어 쓸 수 있어요. 공도 둘레와 무게 정도의 기준만 있죠. 선수 손에 맞게 갈기도 하고 딱딱하게도 하죠. '홈통'(BC 3급 선수들이 공을 잘 굴릴 수 있도록 돕는 보조기구)도 최대 크기에 대한 규정만 있어요. 그런 걸 항상 고민하고 준비하는 게 우리 몫이죠."

이런 후방 지원은 선수 역량에 날개를 달았다. 권 코치와 벌써 9년째 호흡을 맞추고 있는 정호원(28·뇌병변장애1급)선수는 지난 6년간 세계 최강을 지켰던 선수다.

"3…단…."

정호원 선수의 웅얼거림에, 권 코치는 보지도 않고 홈통의 높이를 조정했다. 끈끈한 팀워크가 이들의 최대 무기다.

"뇌병변 장애를 가진 이들과는 정상적인 소통이 어려워요. 하지만 호원이와는 이제 눈빛만 봐도 통하죠. 국제대회에서 몰래 사인을 주고받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정도예요(웃음)."(보치아의 정식 시합 중에는 코치가 게임이 진행되는 상황에 참여할 수 없다.)

무대 뒤편에서 손이 빨개지도록 장비를 다듬는 보치아 코치의 숨은 노력,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가 30명 안팎에 불과하고, 경기 인프라도 부족한 상황에서 15년간 세계 패권을 지켜왔던 원동력이다(보치아 종목은 19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부터 2012 런던 대회까지 꾸준히 금메달을 획득한 효자 종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