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일본 자동차기업 '혼다'는 두 발로 아장아장 걷는 인간형 로봇 '아시모(ASIMO)'를 공개했다. 바퀴가 아닌 두 발로 균형을 잡으면서 걷는 아시모를 본 과학계와 일반 대중은 일본의 뛰어난 로봇 기술력에 감탄했다. 당시 "나도 저런 로봇을 만들어보겠다"고 다짐한 한국 과학자가 있었다. 바로 KAIST(한국과학기술원) 기계공학과 오준호(61) 교수였다. 오 교수는 2001년부터 연구비 지원도 없이 학생들과 함께 외국 잡지를 뒤져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2004년 12월 한국 최초의 인간형 로봇 '휴보(HUBO)'를 선보였다.

6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포모나 전시장에서 열린‘로봇공학 챌린지(DRC)’대회에서 오준호 교수(상금 팻말 든 사람)가 이끄는 KAIST 팀이‘DRC 휴보2’로봇으로 우승해 상금 200만달러(약 22억원)를 받았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15년 6월6일(현지 시각). 휴보는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 주최로 열린 '로봇 공학 챌린지(DRC)' 결선대회에서 일본과 미국, 독일, 이탈리아, 홍콩 로봇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재난 수습 로봇이 됐다. "일본에 지기 싫다"는 오기로 시작한 연구로 불과 14년 만에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5개의 일본팀들은 모두 하위권에 머물렀다.

결선 대회장은 실제 후쿠시마 원전 사고 현장을 본떠 만들어졌다. 각 로봇에는 ▲차량 운전 ▲차량 하차 ▲문 열고 들어가기 ▲밸브 닫기 ▲벽에 구멍 뚫기 ▲콘센트 꽂기 ▲장애물 치우기 ▲계단 오르기 등 8가지 과제가 주어졌다. 참가팀들은 대회장에서 수백m 떨어진 곳에서 제한된 속도의 와이파이(무선랜) 통신으로만 로봇을 조종해야 했다. 로봇의 눈을 통해서만 현장을 파악할 수 있고, 그나마 통신도 자주 끊기기 때문에 만일의 경우 로봇이 스스로 상황을 판단해 정해진 과제를 수행하는 인공지능(AI) 기능도 필요했다.

지난해 예선에서 휴보는 안정적으로 걷는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은 미국과 일본 기업들에 다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이미지 전문가인 KAIST 권인소 교수(전기 및 전자공학부)가 휴보팀에 합류했다. 권 교수는 "오 교수가 '심 봉사(휴보) 눈 좀 뜨게 해달라'고 해서 함께 휴보 제작에 참여했다"면서 "주변 사물을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시각처리 시스템을 바꾼 뒤 휴보의 행동 속도나 움직임이 대폭 개선됐다"고 말했다. 드릴을 잡고 스위치를 켜거나 밸브를 정확히 잡아 돌릴 수 있는 '밝은 눈'을 달아준 것이다.

운전하고… 벽 뚫고… 밸브 잠그고… - 6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포모나 전시장에서 열린‘로봇공학 챌린지(DRC)’결선에서 KAIST팀의‘DRC 휴보2’로봇이 차량을 운전해 가상 재난 지역으로 진입하고, 드릴로 벽을 뚫고, 밸브를 손으로 돌려 잠그는 등(사진 위에서부터) 8가지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를 위해 제작한 'DRC 휴보2'는 무릎 부분과 발끝에 바퀴가 달려 있다. 빠른 속도로 평지를 이동할 때는 무릎을 접고 꿇어앉은 자세로 바퀴를 이용해 달린다. 작업을 하거나 계단을 오를 때는 다시 두 발로 일어서 걷는다. '변신 로봇'이 된 것이다. DRC에 출전한 로봇 중 용도에 따라 작동방식까지 변하는 것은 휴보뿐이었다. 휴보는 마치 사람이 안에 들어가서 움직이는 것처럼 8가지 과제를 안정적이고 완벽하게 수행해냈다.

3위를 차지한 '타르탄 레스큐'를 제작한 미국 카네기멜런대의 토니 스탠츠 교수는 "휴보가 주변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면서 "참가팀 중에서 가장 재난 현장에 적합한 로봇을 구현해냈다"고 평가했다. MIT의 한 연구원은 "일본만 경쟁자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한국도 동등하게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 결승에 진출한 24개팀 중 8개팀이 한국산 로봇 본체나 부품을 사용했다는 점도 의의가 크다. 독일 본대학팀은 한국 로봇기업 '로보티즈'가 개발한 액추에이터(구동장치)를 사용해 4위에 올랐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네바다대팀도 휴보에 독자 소프트웨어를 적용해 8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6개팀에 로봇을 공급한 로보티즈 김병수 대표는 "역사가 오래된 산업용 로봇 시장은 일본이 장악하고 있지만 한창 기술 발전이 이뤄지고 있는 인간형 로봇이나 교육용 로봇 분야는 한국이 선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단기 성과에만 집착하면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저명한 로봇 전문가인 데니스 홍 UCLA 교수는 "로봇이 실질적으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미래 산업으로 성장하려면 꾸준한 연구와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