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정유미(35)씨는 최근 서점에 들렀다가 장강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민음사)를 샀다. 인문사회과학 책을 즐겨 읽는 정씨가 소설책을 구매하게 된 건 표지 덕이 컸다. 그는 "내용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표지가 예뻐서 책이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책의 표지는 서양화가 정수진(46)의 그림 '방향도 목적도'(2007)를 담았다. 출판계에서 명화(名畵)가 아닌 국내 젊은 작가의 작품을 표지에 이용하는 건 드문 일이다. 민음사 관계자는 "한국 문학 작품을 하드 커버로 출간하는데 독자 입장에선 하드 커버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이 때문에 젊은 화가의 발랄한 작품을 이용해 독자들이 책을 친근하게 느끼도록 했다"고 말했다.

어느 책에 손이 가나요 한 뼘 책 표지는 북 디자이너와 저자, 편집자 간의 신경전이 벌어지는 곳이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현하고 싶어 하고, 저자는 책 내용이 잘 표현되길 원하며, 편집자는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미지를 요구한다. 디자이너가 공들여 만들었으나, 사정상 표지가 되지 못한 ‘B컷’(작은 사진)과 최종 표지(큰 사진)를 함께 소개한다. 왼쪽부터 혼다 테쓰야 소설 ‘스트로베리 나이트’(디자인 박진범), 파울로 코엘료 소설 ‘브리다’(디자인 송윤형), 윤태호 만화 ‘이끼’(디자인 김형균).

책의 '첫인상'인 표지는 독자가 책을 집을지 말지를 결정하게 하는 '유혹의 관문'이다. 시각적 요소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면서 최근엔 표지가 책의 흥행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급부상하고 있다. 한 출판 편집자는 "아무리 책 내용이 좋아도 독자가 책을 손에 들지 않으면 구매로 연결되지 않는다"며 "독자가 책을 사게 하려면 일단 표지가 좋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 책은 세련되게, 남성 책은 담백하게

펭귄 클래식 코리아가 지난 3월 내놓은 '마카롱 에디션'은 표지 디자인이 판매를 부추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 등 서양 고전 일곱 권을 세트로 발행한 것인데, 각 책의 표지를 3단으로 나눠 마카롱처럼 알록달록한 빛깔을 입혀 내놓았더니 지금까지 권당 3000부 정도가 팔려 나갔다. 요즘 같은 출판 시장 불황에 신간이 아닌 고전이 3000부 팔렸다는 건 괄목할 만한 일이다. 이영미 펭귄 클래식 코리아 대표는 "이미 이 책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이 표지로 갖고 싶다'며 다시 구매하더라"며 "책날개를 없애 가격은 낮추고 펭귄 디자인은 그대로 살려 '낡을수록 아름다운 책'이라고 홍보한 것도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출판사들은 책을 구매할 핵심 독자층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출판 시장의 주 고객인 20~3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한 책이 표지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2000년대 초반 핸드백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사이즈에 앙증맞은 일러스트 표지가 유행했고, 2000년대 후반부터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사진 전시가 인기를 끌면서 표지에도 사진을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진을 표지에 적극적으로 이용한 책으로는 2008년 출간된 정혜윤 인터뷰집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푸른숲)가 대표적이다. 그전까진 저자 사진을 책 표지에 사용하더라도 프로필 사진 수준이었지만, 이 책은 유명 사진가 김아타에게 의뢰해 불 꺼진 서점 책장 앞에 앉은 저자의 모습을 '작품'처럼 찍어 표지로 삼았다.

표지에 사진을 활용하는 디자인은 영역을 계속 넓히고 있다. 북디자이너 송윤형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실을 '기록'한 사진의 속성이 상상의 산물인 문학과 안 맞는다고들 생각했는데 젊은층이 사진 이미지를 선호하자 어느새 문학 작품에서도 사진을 이용한 책 표지가 유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성 독자를 겨냥한 책들이 시선을 끄는 '세련된 표지'를 지향하는 반면, 남성 독자를 대상으로 한 책은 일러스트나 사진 없이 제목만 도드라지게 하는 식의 '만만한 표지'를 미덕으로 한다. 남성 독자들은 표지가 너무 고급스러우면 부담을 느껴 오히려 책을 잡지 않기 때문이다. 김형보 어크로스 출판사 대표는 "30대 중반~40대 남성을 타깃으로 하는 책은 '적당한 난도의 표지'로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클릭! 유혹하는 책 표지

출판 시장이 온라인 서점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책 표지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다. 박하영 알라딘 도서1팀장은 "온라인 서점 독자들은 순간의 '클릭'만으로 책 구매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책 표지가 순식간에 독자의 눈길을 끄느냐가 판매의 관건이다"고 말했다. 웹에서 구현되는 책 표지는 실물에 비해 크기가 작고 평면적이다. 그러다 보니 온라인 서점에선 제목이 눈에 잘 띄고 깔끔한 표지를 선호한다. 박하영 팀장은 "출판사들은 흰 표지를 많이 쓰지만 흰 표지의 책은 웹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온라인에선 색깔이 있는 표지가 더 인기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영 예스24 도서팀장은 "온라인용 표지를 따로 제작하는 출판사도 많다"고 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유행했던 띠지가 사라지는 추세인 것도 온라인 서점의 영향이다. 양희정 민음사 부장은 "띠지는 책이 매대에 누워 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역할을 하는데 온라인 서점에선 표지의 효과를 살리려고 띠지를 벗겨버리기 때문에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SNS가 책의 주요 홍보 수단이 된 것도 출판사들의 '표지 경쟁'을 가열시키고 있다. 박하영 알라딘 팀장은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북스타그램'을 비롯해 표지가 예쁜 책 사진을 SNS에 올리는 놀이가 인기를 끌고 있다. 출판사들이 표지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책 표지의 중요도가 증대하는 추세에 발맞춰 최종본에는 반영되지 않은 책 표지 시안(試案)들을 소개하는 책도 나왔다. 최근 달 출판사에서 출간된 'B컷-북디자이너의 세 번째 서랍'은 북디자이너 7명이 표지로는 구현되지 못하고 마음에만 품었던 '표지 역작'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이 책 담당 편집자 김지향씨는 "한 뼘 공간 위에 독자들의 시선을 집약적으로 모으는 '작품'으로서의 책 표지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