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래자랑〉(KBS)은 전국에서 노래 좀 한다 하는 이들이 모이는 유서 깊은 프로그램이다. 2004년 충청남도 예산 편에서 일곱 살짜리 아이가 댕기 머리를 땋고 나와 ‘군밤타령’을 야무지게 부른 일이 있다. MC인 송해가 하도 신기해 “너 어디 송씨냐”라고 물으니 “송해 송씨”라는 깜찍한 대답을 내놓기도 했다. 4년 뒤인 2008년 〈전국노래자랑〉 왕 중 왕전이 열렸다. 초등학생이 된 송소희는 이때 ‘창부타령’을 불러 왕 중 왕에 올랐다. 처음에야 귀여워서 시선을 모았다고 하지만, 전국의 고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초등학생이 우승을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SBS 〈스타킹〉에서 ‘국악신동’으로 섭외하는 전화가 왔다. ‘국악소녀 송소희’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가 됐다.

국악에는 판소리와 민요가 있다. 민요는 크게 남도민요와 경기민요로 나뉜다. 〈흥부가〉 〈춘향가〉 〈적벽가〉 등이 판소리, 〈육자배기〉 〈강강술래〉 〈쾌지나 칭칭 나네〉 등이 남도민요, 〈아리랑〉 〈늴리리야〉 〈군밤타령〉 등이 경기민요다. 송소희가 주로 부르는 것은 경기민요다. 그의 고향 충청도에 있던 유일한 국악 선생님이 경기민요 전공자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우연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피아노도 미술도 오래 흥미를 갖지 못했는데, 국악만은 끈질기게 해냈다.

“판소리는 고수와 북을 치면서 (노래를) 해요. 반면 경기민요는 다른 관현악단과 함께 반주에 맞춰 하죠. 덕분에 다른 악기들과 호흡을 맞추는 연습이 조금 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재밌다는 생각을 못했지만, 힘들다는 생각도 안 들었어요. 선생님들이 시키니까 ‘당연히 해야지’ 생각했죠.”

송소희는 스승 복(福)이 있었다. 처음 국악을 배운 건 박석순 스승, 사물놀이와 비나리는 사물놀이의 창시자인 이광수에게 배웠고, 본격적인 소리는 무형문화재 이호연 선생에게 배웠다. 이호연 선생은 “소희 이후에 민요를 하고 싶어 하는 꿈나무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민족의 역사만큼 민요의 깊이도 깊다. 고작 다섯 살에 민요를 시작한 아이는 겨레의 넋을, 때로는 한(恨)을 담은 이 소리들을 어떻게 체득해갔을까.

“워낙 어릴 때부터 배웠기 때문에 가사를 이해할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날 한 스승님이 ‘너 이 노래가 무슨 의미인 줄은 아니?’라고 물으셨어요. 굉장히 부끄러웠어요. 노래를 하는 사람인지, 노래 부르는 기계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어렸을 때는 어렵고 힘들어서 감정을 담지는 못했어요. 지금은 가사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한자 공부도 많이 하고 있어요.”

듣는 이가 없는 노래는 메아리 없는 외침이다. 사춘기 시절 무대에서 “다음 무대는 국악입니다”라는 소리에 속속 자리를 뜨는 관객들을 보며 ‘이 길이 정말 내가 가야 할 길인가’를 고민한 적도 있었다. 도망치는 대신, 길을 내보자고 생각했다.

“중학교 3학년쯤 사춘기가 왔어요. 크게 반항할 깡은 없었기 때문에 내색은 못 했지만, 속으로는 방황했어요. ‘내가 이 길을 계속 가는 게 맞나’라는 생각을 했었죠.”

열아홉 살 때 ‘국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음반을 준비하게 됐다. 어릴 적에는 스승들처럼 무형문화재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지금은 달라졌다. 그런 명예를 얻지 못하더라도 관객의 가까이에서 국악을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 ‘송소희 밴드’를 만들었고, 국악에 펑크・블루스・록 등을 접목해 새롭게 해석했다. 전체 프로듀싱은 베이스를 맡은 이형성이 맡았다. 송소희는 보컬과 작사가로 참여했다.

“앨범을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밴드를 결성했고, 국악뿐 아니라 모든 장르의 노래를 다 공부했어요. 그러다 ‘군밤타령’에는 펑크한 느낌이 있고, ‘늴리리야’에는 블루스적인 요소가, ‘매화타령’은 록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죠.”

그의 앨범 〈NEW SONG〉을 들어보면, 퓨전 레스토랑에 온 느낌이 든다. 전반적인 리듬과 보컬의 창법은 국악인데, 반주의 선율과 멜로디는 귀에 착 감긴다. “일구월심 / 그리던 님 / 어느 시절에 / 만나볼까 / 설부화용 / 자랑마라 / 세월 흐르면 / 허사로다”라는 ‘달맞이꽃(늴리리야)’이 옛날 민요가 아닌, 슬픈 사랑의 노래로 들린다.

송소희가 작사에 참여한 노래는 ‘지금처럼만’이다. 14년째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 함께하고 있는 부모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았다.

“많은 사랑을 받다 보니까 저도 사랑을 드리게 돼요.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신 덕분에 갈수록 제 꿈에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들고요. 지금은 객석의 반응도 많이 달라졌어요. ‘지금처럼만’을 부를 때는 저희 부모님 같은 분들이 많이 우시더라고요.”

송소희 또래의 가수는 아이돌이 많다. 이들에 대한 객석의 반응은 열광과 환호성이다. 송소희의 무대에 대한 반응은 다르다. 말없이 눈을 감고 있는 관객,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관객, 몰래 지역 특산물을 두고 가는 관객…들이 그의 객석을 채운다.

“팬들에게 받는 사랑의 깊이도 달라요. ‘변심’이 없으세요. 앨범을 안 내도 ‘언제 나오나’ ‘왜 안 나오나’ 묻지 않으세요. 그냥 묵묵히 기다려주세요. 요즘은 팬층이 넓어져서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요. 젊은 분들이 국악에 관심을 가져주시니까요.”

송소희의 고향은 충청남도 예산이다. 어릴 적부터 동네에 ‘소리꾼’이 있다는 걸 알았던 이웃들은 그를 꾸준히 응원했다.

“제가 시골에서 자라서 좋았던 점은 정 많은 동네에서 자랐다는 거예요. 옆집 슈퍼 할아버지, 묵집 할머니 같은 분들이 어릴 때부터 저를 보셨고,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고 또 좋아해주셨어요. 작은 공연이라도 꼭 찾아와 꽃다발도 주시고요. 제가 굉장히 중요한 존재가 된 것 같았죠. 그런 과정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국악신동이 ‘동네의 자랑’이라 그랬던 게 아닌가 싶은데, 송소희의 생각은 다르다.

“저는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워낙 어릴 때부터 하다 보니까 익숙해진 거죠. 꾸준히 소리를 해왔기 때문에 ‘방울목(경기민요를 부르기에 좋은 목을 이르는 말)을 타고났다’기보다는 ‘방울목을 찾았다’는 게 맞아요. 그래도 국악을 점점 더 사랑하다 보니까, 국악을 알릴 수 있는 저만의 방법을 찾게 되더라고요.”

흔히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그 노래를 닮아간다고 하는데, 송소희도 그렇다. 또래보다 깊고, 그런 만큼 맑다. 일찍 무대를 알아버린 탓에 먼저 철이 든 이 소녀는 ‘송소희답게’ 국악을 알리고 싶다고 한다. 그의 전국투어 〈알송달송〉은 5월 1일 서울 국립극장을 시작으로 부산・대구・전주・창원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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