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훈 문화부 기자

할리우드 영화 속 한국과 한국인은 폼 나게 나온 적이 별로 없다. '007 어나더데이'(2002년)의 한국은 물소 떼가 느릿느릿 걷는 늪지대였다. TV 시리즈 '로스트'에선 개천 위 돌다리에 '한강대교' 푯말이 붙어 있었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감독이 만든 '클라우드 아틀라스'(2013년) 속 미래 서울엔 눈꼬리가 째진 사람들이 다다미 방에 북적댔다. 'G.I 조' 시리즈(2009·2013년)의 이병헌이 있지만 그 배우가 코리안인지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었다.

1000만 관객을 넘어선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보며 과거 할리우드 영화 속 한국과 한국인을 생각했다. 영화는 무성한 뒷말을 낳았다. '그 정도 나오자고 촬영팀이 쓰고 간 130억원 중에 30억원이나 보전해 준거냐'는 비난도 있었다. '서울인지 모르겠다' '첨단 도시라더니 별로' '전철 의자 방향이 틀렸다'고 했다.

'어벤져스'는 왜 굳이 서울에 왔던 걸까? 최근 방한했던 영화 '인터스텔라'의 제작자 린다 옵스트에게 지나는 말로 물었다가 뜻밖의 답을 들었다. 이 할리우드의 실력자는 "그건 단순한 상술이 아니라 산업 구조 변화에 따른 필연이다. 미국 영화사들은 앞으로 더 자주 한국 영화계에 손을 내밀고, 한국과 한국 배우를 등장시킬 것"이라고 했다.

이유는 이렇다. 2000년대 후반 미국 DVD 시장이 무너졌다. 불법 다운로드와 유료 온라인 영화 시청 서비스 '넷플릭스'의 등장 때문이었다. 치솟는 제작비를 DVD 팔아서 메우던 할리우드의 돈줄이 막혔다. 중국·인도·한국 등 신흥 시장은 때맞춰 나타난 구원자였다. 신흥 시장 관객몰이로 '아바타'(2009년)가 최고 흥행작 반열에 오르자 할리우드는 유사한 특수 효과 중심 영화를 앞다퉈 만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미국 7, 해외 3' 비율이던 영화 매출 구조도 역전됐다. 지금은 '미국 3 대 해외 7', 심하면 '2 대 8'이다. 옵스트가 저서 '할리우드의 잠 못 드는 밤'에서 '뉴 애브노멀(New Abnormal·새로운 비정상)'이라고 이름 붙인 미국 영화 산업의 격변이다. 이후 할리우드는 마법사나 수퍼 영웅물(物)을 줄기차게 찍고 있다. 신흥국 관객에게 이미 익숙한 해리 포터나 아이언맨을 앞세워야 돈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영화 '아바타'를 1400만명이 본 나라다. 협력할 수 있는 영화 산업 기반도 탄탄하다. '어벤져스'가 서울에 온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던 셈이다. '어벤져스' 속 서울엔 물소 떼 대신 감독이 "최고"라고 상찬한 빌딩 숲이 나왔다. 유전공학자로 출연한 수현은 '트랜스포머4'의 중국 여배우처럼 들러리가 아닌 당당한 조연이었다.

한국 영화 시장은 포화 상태다. 한계가 뻔한 내수 시장에 안주하면 시든다. 마침 할리우드 메이저들이 속속 한국 영화 직접 제작에 나서고 있다. 할리우드라는 고래 등에 올라타고 더 많은 우리 영화인들이 넓은 바다로 나가는 걸 보고 싶다. 한국과 해외 영화계가 접촉면을 넓히도록 정부도 도와야 한다. '어벤져스'는 예고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