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해방과 분단으로 한국 경제는 큰 혼란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6·25전쟁의 파괴로 인해 한국 경제는 최악의 상태에 놓였다. 1951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1990년 가격 기준으로 볼 때 787달러에 불과했다. 아프리카 대륙 53개국의 평균 912달러에도 못 미쳤다. 이런 경제를 재건하고 1960년대의 고도 성장으로 이끈 것이 미국과 유엔의 원조였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총 31억달러의 경제 원조가 이뤄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경제를 재건하고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세계 각국에 많은 원조를 제공했다.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원조를 받았다. 미국의 어느 학자는 "한국 한 나라가 아프리카 대륙 전체보다 더 많은 원조를 받았다”고 했다. 이를 부정하기는 힘들다.

한국 경제는 미국과 유엔의 무상(無償) 원조 덕분에 부흥했다. 1953년 국민소득에서 경제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10%에 이르렀다. 1956년에는 이 비중이 최고 13%까지 올라갔다. 당시 투자 자금의 90%는 원조에서 나왔다. 한국 경제가 전쟁 이후 1960년까지 4~5%의 성장을 이룬 것은 대부분 원조의 힘이었다. 원조 달러를 민간에 불하하면, 민간은 그에 상당하는 한화(韓貨)를 한국은행에 예치했다. 이 대충자금(對充資金)의 상당 부분은 정부의 재정수입으로 이전(移轉)됐다. 1954~1959년 대충자금 전입금이 재정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43%에 이르렀다. 1967년에도 이 비중은 20%였다. 엄밀히 말해 그때까지 대한민국은 재정적으로 ‘독립국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의 ‘대외 원조 물자 발송 협회(CARE)’의 원조를 받은 한국 어린이들이 급식을 먹는 장면(사진 위)과 유엔 한국재건단(UNKRA) 관계자들이 1959년 구호물자 전달을 참관하는 모습.

원조에는 목적이나 관련 법, 공여 기관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었다. 가장 먼저 실시된 것은 구호 원조였다. 1945년 한국에 상륙한 미군은 식량 부족·전염병·폭동을 방지하기 위해 밀·비료·의복·석탄·석유 등을 제공했다. 이는 ‘점령지 구제 정부 자금(Government and Relief in Occupied Areas)의 약자를 따서 ‘가리오아(GARIOA) 원조’라고 불렸다. 1948년까지 4억달러를 넘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유엔은 민간 구호를 목적으로 원조를 제공했다. ‘민간 구호 원조(Civil Relief in Korea)’의 머리글자를 따서 ‘크리크(CRIK)'라고 불렸던 이 원조는 1954년까지 4억5000만달러에 달했다. 헌 옷·밀가루·담요·침대·쌀·소금·메밀·위생상자·고무신·캐러멜 등으로 원조 물자의 내역도 다양했다. 피란민에게는 하루에 쌀 2홉과 현금 50원을 지급했다. 200만 명의 피란민과 월남민이 이 원조 물자 덕분에 그해 추운 겨울을 버틸 수 있었다.

미국 원조 구호품 가운데 옥수수가루 봉투. 뒷면에는 ‘미국 국민이 기증한 것’이라는 문구가 한글로 적혀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정부는 한국 경제를 부흥시킬 목적으로 원조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미 국방부의 대외활동본부(FOA)와 국무부의 국제협조처(ICA)가 이를 주관했다. 이 원조는 1953년부터 1961년까지 도합 17억4000만달러로, 전체 원조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국과 미국 정부의 대표 1명씩으로 구성된 합동경제위원회가 서울에 설치됐다. 이 위원회는 한국 정부와 경제 전반에 대해 협의했다. 한국 정부는 이 위원회의 건의를 수용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위원회의 권한은 그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원조의 방향을 둘러싸고 양국 정부 사이에는 심각한 의견 대립이 생기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원조 자금으로 전기·비료·시멘트 등의 기간산업을 건설하고자 했다. 반면 미국 정부는 소비재 공급과 인플레 억제가 우선이라며 경공업의 재건을 중시했다. 원조 내역은 대체로 공여자인 미국의 입장에 따라 결정됐다.

1954년 미국 정부는 자국의 농산물 가격을 유지하고 후진국에 식량을 원조할 목적으로 공법(PL) 480조를 제정했다. 이 법에 근거해서 PL 480 원조가 한국에 실시된 것은 1956년부터다. 1961년까지 2억달러를 약간 상회했다. 제공된 농산물의 내역은 밀 40%, 보리 19%, 쌀 16%, 원면 11%, 돈육 통조림 5%, 엽연초(葉煙草) 5% 등이었다.

미국의 원조는 고질적인 식량난 해결에 톡톡히 기여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종래의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1950년대부터 비판적인 정치 세력은 “미국의 원조 때문에 한국 경제가 미국에 종속된다”고 우려했다. 특히 PL 480 원조가 비판의 표적이었다. 그로 인해 한국의 농업이 피폐해졌다는 것이다. 원조의 배분을 둘러싸고 정경 유착과 부정부패가 심화됐다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평가 가운데 상당 부분은 사실 오인(誤認)에 바탕하거나 부작용을 과장한 것이다.

PL 480 농산물이 일시 과다 도입되어 농민들을 괴롭힌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 부작용을 과장해서는 곤란하다. 원조 총액 31억달러 가운데 PL 480 원조는 2억달러에 불과했다. 현행 일부 역사 교과서가 ‘미국 농산물의 도입으로 면화와 밀 생산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서술한 대목은 사실을 오인한 것에 가깝다. 밀의 경작 면적은 일제 시절인 1943년에 7만9000㏊(헥타르)였지만, 1957년 8만8000㏊, 1970년에 9만6000㏊로 오히려 늘었다. 반면 면화(綿花) 경작 면적은 1943년에 27만㏊에 이르렀지만, 해방 후 1948년에 이미 12만㏊로 감소했다. 면작(綿作)을 강제했던 일제가 물러갔기 때문이다. 면작 농업 하나가 ‘면화의 왕국’ 미국과 맞서 자립적 민족 경제의 토대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전후의 세계경제는 미국이 중심이 된 체제이다. 후진국이 이 체제를 떠나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고자 했던 노선은 어느 나라에서도 실패했다. 원조를 통해 한국은 미국 체제에 포섭됐다. 1960년대에는 미국에 공산품을 수출하는 나라로 발돋움했다. 원조가 일으킨 공업 덕분이었다. 원조가 농업에 미친 부작용은 한국 경제가 미국 중심의 체제에 포섭되는 과정에서 지불해야 했던 비용과도 같았다.

1950년대는 자력 수출로 달러를 벌 수 있는 경제가 아니었다. 외환 시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원조 달러는 민간에 정책적으로 배분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정경 유착이나 부정부패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는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복수 환율제, 수출입 링크제 등 갖가지 노력을 다했다. 그 실상을 돌아보면 자립적 국가 경제를 위한 초대 정부의 노력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