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현지 시각) 아일랜드 서쪽 항구도시 골웨이의 아일랜드 국립대학. 이틀 일정으로 아일랜드 방문에 나선 영국 찰스 왕세자의 환영 행사가 열렸다. 행사장에 들어선 찰스 왕세자가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 신페인(Sinn Fein)의 게리 애덤스 대표를 발견하고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이들은 한동안 손을 굳게 잡은 채 귓속말을 나누기도 했다.

영국 왕실 인사가 신페인당 대표를 만난 것은 창당 110년 만에 처음이다. 피로 얼룩진 구원(舊怨) 때문이다. 1979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사촌이자 찰스 왕세자의 당숙인 마운트배튼 경(卿)이 아일랜드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무장 단체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테러로 숨졌다. 신페인당은 IRA의 정치 조직으로, 당시 신페인당 부대표였던 애덤스는 마운트배튼 경 암살에 대해 "합당한 이유가 있다"며 옹호했다. 마운트배튼 경을 아버지처럼 따랐던 찰스 왕세자로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영국 찰스(왼쪽) 왕세자가 19일(현지 시각) 아일랜드 국립대에서 게리 애덤스 아일랜드 신페인당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애덤스 대표는 1979년 찰스 왕세자 당숙이 살해됐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 테러를 옹호했던 인물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런 배경을 전하며“찰스 왕세자와 애덤스 대표가 역사적인 악수를 나눴다”고 보도했다.

애덤스에게도 찰스 왕세자는 결코 환영할 수 없는 인물이다. 1972년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독립을 요구하던 시위대 14명이 영국 공수연대의 총에 맞아 숨진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다. 찰스 왕세자는 아일랜드인에게 점령군과 같은 그 공수연대의 명예 연대장을 맡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2011년 영국 왕실 인사로는 100년 만에 아일랜드를 국빈 방문했을 때도 애덤스 대표는 여왕과의 면담을 거부했다. 지난해 엘리자베스 여왕이 마이클 히긴스 아일랜드 대통령과 IRA 출신의 마틴 맥기네스 북아일랜드 제1부장관을 윈저성에 초대했을 때 역시 애덤스 대표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이런 악연에도 찰스 왕세자가 애덤스 대표를 만난 것은 영국 정부의 요청 때문이었다. 영국은 지난해 스코틀랜드에서 독립 찬반 투표가 열리는 등 북아일랜드·웨일스 등 지방정부에서 분리독립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여론을 다독이기 위해 영국 왕실이 나서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립을 해소하고 역사적 화해를 시도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구교(가톨릭) 신자가 절대다수인 아일랜드는 신교 중심의 영국에 의해 1801년 합병됐다. 무장 투쟁 끝에 아일랜드는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북아일랜드 6개 주는 신교도 주민이 다수라는 이유로 독립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후 IRA를 중심으로 북아일랜드 독립 투쟁이 벌어졌다. IRA의 테러와 영국의 보복이 이어지면서 1969년부터 30년 동안 3700여명이 숨졌다. 1998년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타결로 유혈 사태는 종식됐지만, 신페인당을 중심으로 분리독립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BBC 방송은 "찰스 왕세자의 방문이 영국·아일랜드 화해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날 찰스 왕세자와 애덤스 대표는 약 15분 동안 별도의 만남을 가졌다. 애덤스 대표는 "과거 문제들에 대해 서로 유감을 표명했다"며 "과거의 치유와 미래를 위한 전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나누었다"고 말했다. 찰스 왕세자는 20일 마운트배튼 경이 테러로 숨진 슬라이고 지역을 방문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애덤스 대표가 마운트배튼 경 테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사과 의사를 밝히지 않아, 양측 간 구원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