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韓紙)의 내구성은 8000년 동안 지속된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앞으로 유럽의 종이 문화재를 복원하는 데 한지가 적극 쓰여야 해요." "한지는 종이의 결(방향성)이 없어 필사본 복원에 유용합니다."

지난 8일(현지 시각)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바티칸박물관이 '고문서 및 예술 작품 복원에 있어 한지의 유용성'이라는 심포지엄을 열었다. 유럽의 문서 복원 전문가 100여명 앞에서 한지의 효용성을 앞다퉈 발표한 이들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종이 문화재 복원 관련 학자 10여명이 결성한 '그룹(Group) 130'. 이들은 지난해 6월 주(駐)밀라노 한국총영사관이 주최한 '한지 워크숍' 이후 자발적으로 한지 홍보대사가 됐다.

파올로 칼비니 교수는 “한지는 일본 화지보다 가격 경쟁력도 있다. 앞으로 유럽 종이 문화재 복원에 두루 쓰일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친 그가 다시 트레비소행 기차에 올랐다.

11일 오전(현지 시각) 이탈리아 베네치아 본섬에서 '그룹 130' 대표 격인 파올로 칼비니(Calvini·68) 베네치아 카 포스카리(Ca' Foscari)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로마의 국립도서병리학연구소(ICRCPAL) 출신 화학자이자 저명한 종이 분석 전문가다. 트레비소에 거주하는 그는 인터뷰를 위해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로 건너왔다.

"그동안 유럽에서 한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어요. 현재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의 종이 문화재 복원은 일본 화지(和紙)가 독식하고 있습니다. 99%예요. 티슈를 특정 제품인 크리넥스라고 부르는 것처럼 유럽 복원 시장에선 '화지'가 종이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지요. 그런데 한지가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나온 겁니다."

칼비니 교수는 '그룹 130'은 이탈리아 고문서·종이 복원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한지 팬클럽이라고 소개했다. '130'이란 지난해 한·이 수교 130주년을 계기로 결성됐다는 뜻. 주밀라노 총영사관이 지난해 이탈리아 굴지의 산업연구센터인 인노브허브(InnovHub)와 함께 한지 적합성 테스트를 시행한 결과, 산성도·두께·표면 고름·저항성 등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그는 "복원용 종이는 강한 내구성과 유연성, 복원용 접착제와의 상호 유용성 등을 갖춰야 하는데 한지는 거의 모든 항목에서 탁월했다. 특히 내구성이 최대 8000년까지 지속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그룹 130' 회원들은 "한지는 물에 저항이 강하며 표면이 고르고 광택이 없어 우수하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고문서 등 24점을 한지로 시험 복원한 결과다. 이탈리아의 종이 복원 전문가인 넬라 포치(Poggi)는 "일본 화지는 리베리아나 섬유로 제작된 종이로, 피렌체에서 홍수가 난 1966년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리베리아나 섬유는 종이 작품이 찢어지거나 긁혔을 때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섬유였다"며 "한국의 한지는 종이의 결(방향성)이 없어 필사본 복원에는 한지가 화지보다 더 뛰어나다"고 했다.

한지로 복원 중인 교황 요한 23세의 지구본.

이들은 지난 4월 열린 런던 국제회의와 이번 바티칸 심포지엄을 계기로 앞으로 이탈리아에서 수차례 학회를 열 계획이다. 한국 정부와 함께 유럽 고문서·벽화·지도·고서화 등의 한지 복원 작업도 펼친다. 외교부와 주이탈리아대사관, 문화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협업하는 '한지 인(in) 유럽' 프로젝트다. 주이탈리아대사관 홍진욱 공사참사관은 "연간 수천억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장에 한지가 처음으로 진출했다"고 했다.

첫 번째 사업으로 지난달부터 밀라노 인근 베라가모에 있는 교황 요한 23세 박물관의 지구본을 한지로 복원 중이다. 요한 23세가 교황 재임 시절(1958~1963) 바티칸 접견실에 놓고 아꼈다는 지구본은 당시 세계 가톨릭 교구 분포도가 상세히 표시돼 있어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칼비니 교수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복원을 위해서는 산성도, 색상, 투명도 등 보다 상세한 분석이 필요하다"며 "이탈리아 '국립도서병리학연구소'에서 정밀 분석 및 실제 적용 테스트를 실시할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