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혼자 웅크리고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 엄마 뱃속에서 그러고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럴 때 뒹굴거리며 읽은 책들을 이 공간에서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구나. 공감하기도 하고 위로받기도 하고.

'봄에 나는 없었다'(포레 출간)는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불리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책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당연히 탐정도, 범인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이니까 무언가 수수께끼 같은 상황이 전개되지 않을까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추리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스릴과 서스펜스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추리소설의 대가가 집필한 추리소설 아닌 소설인 셈인데, 아가사 크리스티는 사람들이 선입견을 갖고 접하는 게 걱정이 되었던지 이 책을 필명으로 출간했다고 한다. 그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 소설을 쓴 것일까?

작품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영국 중산층 조앤의 이야기다. 성공한 변호사인 남편은 따뜻하고 가정적이다. 아이들도 번듯하게 자랐다. 게다가 조앤은 중년이지만 동년배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외모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겉에 보이는 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다정다감해 보이는 남편은 사실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아름답지도 젊지도 않아서 조앤에게는 질투의 대상도 되지 않았던 이웃집 레슬리. 손 한 번 잡아 보지 않았을 남편은 레슬리가 죽고 나서도 무덤으로 찾아가 자신이 조금 더 용기를 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와 함께하지 못했음에 아쉬워하고 있다. 훌륭하게 성장한 듯 보이는 아이들도 그녀의 고집과 아집에 지쳐 엄마를 멀리하고 있다.

황정민 아나운서·KBS 'FM대행진' 진행

겉과 속이 다른 삶, 아가사 크리스티는 어딘가에 숨어 있는, 그래서 쉽게 꺼내 말하기 힘든 사람들의 속사정과 속마음을 찾아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결혼 후 크고 작은 싸움 끝에 평화가 찾아왔다. 이제는 서로에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던 즈음 남편은 그저 싸우고 싶지 않아서 나의 의견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익숙해진 게 아니라 부딪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내가 이렇게 눈치까지 없다니. 이제는 나의 우려와 걱정이 진정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살아온 패턴을 벗어나는 게 두려운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자기 확신만으로 밀고 나갈 때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의 마음은 알지 못한 채 외톨이로 남게 되지는 않을까. 조앤의 기질이 다분히 내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