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을 잡았다.
그에게 동생이 죽었다.
나는 형사다.
눈앞의 범인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다.
영화 는 이 숙제를 김상경에게 넘겼다.
영웅이 아닌 인간의 얼굴을 한 배우, 김상경을 만났다.

김상경이 있는 현장에는 배우와 스태프가 없다.

대신 형・동생이 있다. 그는 현장에 있는 막내 스태프의 이름까지 죄다 외운다. 덕분에 그가 감정을 잡고 집중해야 하는 신에서는 모두가 숨을 죽인다. 영화 로 입봉한 손용호 감독은 ‘이미지와 실제가 가장 다른 배우’로 김상경을 꼽았다. 스태프들이 “김상경 안에 아줌마 있다”고 할 만큼 김상경은 현장에서 끊임없이 분위기를 북돋고, 사람들을 챙겼다. 그러다가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완벽했다. 첫 영화부터 감독이 현장을 진두지휘하기란 쉽지 않은 일. 손 감독은 김상경 덕분에 연출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현장에서 농담을 많이 해요. 배우든 스태프든 서로 호흡이 맞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신 앞에서는 아예 밖에 안 나올 때도 있어요. 그전에 이미 친해져서 서로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죠. 영화의 중요한 장면은 대부분 뒤에 있거든요.”

그나마 이번 영화에서는 수고가 덜했다. 대부분 의 스태프들이 그대로 옮겨왔다. 제작사도 그대로다. 제작사 대표가 를 제안했을 때 김상경은 "안 된다"고 했다. 2003년에 을 찍고, 10년 만인 2012년에 를 찍었다. 전작에서는 육감에 의지해 사건을 수사하는 송강호에 맞서는 논리적인 서울 형사 서태윤 역이었고, 에서는 15년 전 유괴범을 놓치고 그 사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형사 역이었다.
그 후 많은 이들이 그를 '형사전문 배우'라 불렀다.
그런데 또 형사 역할이라니, 처음엔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 시나리오를 읽었다. 마음이 변했다.

“완전히 다른 역할이니까요. 이나 에서는 형사였을 뿐 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열심히 수사했죠. 이번에는 형사라기보다는 피해자예요. 현장검증 장면에서 피해자의 남편인 김성균씨가 범인에게 달려드니까 한 형사가 발을 걸어요. 태수는 그런 인물이었어요. (건성으로 건들거리며) ‘어이 아저씨, 심정은 아는데 법대로 하셔야죠.’ 쭉 그렇게 살아왔고요. 그런데 그 태수한테 묻죠. 네 동생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는 범인을 잡으면서 시작하는 영화다.

현장에 있던 휴대폰을 수집해 복구해보니 피해자가 내 누이다. 범인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잘 먹고, 잘 자고, 잘사는데 정작 범인을 잡은 형사는 매일 피폐해지고 날로 황폐해진다.

“‘형사전문 배우’라는 말이 저도, 스태프한테도 부담이 됐죠. 그런데 스토리가 달랐어요. 마지막에 태수가 범인에게 총을 쏴요. 완결을 그렇게 확실하게 짓는 영화가 많지 않아요. 논란이 될 거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사회에 굉장히 센 화두를 던지는 거죠. 저는 지금 동생을 잃은 태수가 많이 묻어 있기 때문에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려워요. 개봉하면 싹 비우고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요.”

영화는 사형제도의 맹점을 정면으로 직시한다.

법으로도, 호소로도 구제할 수 없는 피해자의 애끊는 심정은 누가 해결할 것인가. 영화의 한 켠에서 점점 괴물로 변해가는 김성균은 범인이 잡혀도 결코 끝나지 않는 남겨진 자의 고통을 대변한다. 누군가의 아내고 누군가의 누이였던 여자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범인이 입을 열기 전까진 결코 알 수가 없다. 취조실에서 김상경은 범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범인은 천진하게 웃는다.


사회에 화두를 던지는 영화
언론 시사회가 있던 날, 배우들은 처음으로 영화의 완성본을 봤다. 살인마 조강천을 연기했던 배우 박성웅은 중간에 어지럼증을 호소해 병원에 이송됐다. 촬영하는 동안 절대 악인 조강천이 되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렸다. 막상 영화를 보니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이 전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손용호 감독은 조강천(박성웅)에 대해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다. 변명할 거리, 피해 갈 구멍, 이해받을 여지를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다. 태수(김상경)는 달랐다. 언제부터 누이와 단둘이 자랐을까, 부모님은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누이가 밖에서 놀림을 당하거나 맞고 들어오면 태수는 어떻게 했을까… 한 장면 한 장면을 떠올리고 채워갔다.

"현장에서는 모니터도 잘 보지 않아요. 편집실에도 가지 않죠. 저는 영화에 배우의 의견이 들어가는 건 반대예요. 영화는 감독의 역량이라고 보거든요. 감독으로서의 시선을 믿어야죠. 다만 배우에게는 해석하는 눈이 있어요. 배우의 역량이 굉장히 중요하죠. 그래도 조강천 같은 살인범역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살인마 역을 한다면 저는 색깔이 전혀 다른 범인이 나올 거예요."
형사 3부작을 지나오면서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쇄살인사건 전문가가 됐다. 을 찍을 때는 그가 본 자료만 해도 탑을 쌓고도 남는단다.

어떤 패턴으로 살인이 일어나는지, 살인마들의 유형은 어떤지, 한 사건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형사는 없는지 꼼꼼히 살펴봤다. 매 작품이 그에게 숙제를 남겼다. 은 끝내 잡히지 않는 범인이, 는 공소시효가, 그리고 에서는 피해자 가족의 남겨진 삶이 그가 풀어야 할 실타래였다.

“공부를 많이 하면서 작품에 임하기 때문에 연쇄살인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평범한 분들보다는 많이 알죠. 특히 은 살인사건 일지를 이만큼씩 쌓아두고 봤으니까요. 헐렁한 형사는 처음이에요. 3년 전의 태수는 송강호 형 같은 모습이 있죠. 3년 후는 다시 서태윤( 속 김상경이 맡은 서울 형사) 모습으로 바뀌고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김상경은 극한의 고통을 경험했다. 사건 발생 후 3년이 지나고 태수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1주일 만에 10kg을 감량했다. 초반의 능글능글한 태수를 보여주기 위해 살을 급히 찌웠지만 역시 몸에 큰 무리가 갔다.

“이 정도의 극한을 느꼈던 작품은 이후 처음이었어요. 그때 동생이 죽을 때도 힘들었는데, 이번에도 힘들더라고요. 머리로는 ‘이제 해가 질 텐데, 다음 장면 빨리 찍어야 하는데’ 하면서도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질 않는 거예요. 이렇게 절제되지 않는 감정을 느껴본 게 오랜만이었어요. 영화를 보니까 제가 보기에도 놀랄 정도로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더라고요.”

지난해 촬영한 영화 부터 드라마 를 지나 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그의 배우 인생에 이렇게 몰아쳐 보긴 처음이다. 작품 못지않게 휴식이 중요하다는 게 평소 그의 지론이다.

“충전을 해야 또 스태프들이나 사람들이랑 수다를 떨 수 있으니까요(웃음). 책 욕심이 많아서 쉴 때 심리학 책을 많이 봐요. 인간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서요. 수다를 떨어도 무지몽매하게 하면 안 되거든요. 재밌고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려면 다방면으로 책을 많이 봐야 해요. 카테고리로 보자면 인간・문학・과학 순이에요.”

무라카미 하루키 책은 좋아해서 거의 다 찾아봤다. 그중 제일 좋았던 《해변의 카프카》는 영문판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칸 영화제나 해외에 나갈 때 전시용으로 들고 다니기 위해서란다.

“좋은 문구는 외워두었다가 써먹죠. 몽테뉴의 수상록에 그런 말이 나오거든요.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다.’이 말을 새기고 사는데, 얼마 전에 에서 써먹었습니다.”

영화를 통해 나를 알아간다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제가 보여요. 성격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때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요. 제일 좋은 건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살지 않고, 저를 기준으로 살았다는 거예요. 저는 송강호씨 스타일도 아니고, 정우성씨 스타일도 아니잖아요.

한 작품 한 작품이 ‘나답게’ 살려고 노력해온 과정이었어요. 그게 제일 행복하고요. 늘 고민해요. 어떻게 하면 하루를 유쾌하고 행복하게 보낼까를요. 이 인터뷰도 그런 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1시간이 10분 같기를 바라죠.”

김상경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그에게 잊지 못할 순간이 몇 있다. 봉준호 감독과 함께했던 , 홍상수 감독을 만나 알게 된 신세계 , 그리고 국민 귀요미로 만들어준 드라마 … 아마도 이번 는 그에게 가장 극한의 고통을 맛보게 해준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이런 극한을 오가는 건 배우로서 행운이에요. 홍상수 감독님과의 작업은 기존의 영화 문법과 완전히 달라요. 모든 게 즉흥이죠. 그런 작업으로 제 나이에 칸에도 다녀오고, 최근에는 같은 국민드라마도 찍어서 시청률 40%도 나오고요. 심지어 어제는 길에서 어떤 분이 “어우, 귀여워” 그러시더라고요. 딱 봐도 저보다 스무 살은 어려 보이시던데(웃음).”

그는 작품을 선택할 때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는 어머니께 효도한다는 마음으로 찍었다. 늘 영화에만 나오다 보니 어머니 친구들이 ‘네 아들은 배우라는데 왜 안 보이냐’고 하셔서, 주말드라마를 선택했다고 했다. 는 피해자의 가족이 된 심정으로 찍었다. 영화가 개봉한 지금도 ‘태수’에 빠져 있어 객관적인 판단이 힘들다고 했다. 김상경은 그렇게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오빠로 한 작품을 살아낸다.

현장에서 그가 높다란 배우가 아니라 가까운 형으로 보이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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