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작년 11월 베이징 아시아태평양협력체(APEC) 회의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처음 만났을 때 한 번도 미소 짓지 않았다. '외교 결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싸늘한 표정이었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 등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22일 두 사람은 5개월 전과 다른 모습으로 만났다. 중국 관영 CCTV의 화면을 보면 시 주석은 줄곧 넉넉한 표정으로 아베 총리와 대화했다. 입가에 웃음기를 비치기도 했다. 오히려 아베 총리가 살짝 굳은 얼굴이었다. 시 주석은 30여분간의 회동을 마치고 회담장을 나오면서 취재진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날 두 사람은 아베 총리가 시 주석이 기다리는 회담장에 들어가는 형식으로 만났다. 나올 때도 아베 총리가 먼저 나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악수하며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왼쪽 사진). 약 5개월 만인 22일 아시아·아프리카회의(일명 반둥회의)에서 시 주석이 밝은 표정으로 아베 총리를 바라보며 악수하고 있다.

이날 중·일 정상 회동은 시 주석 표정처럼 양국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는 성과를 냈다는 분석이다. 과거사·영토 문제로 충돌하던 중·일 관계를 푸는 열쇠는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 문제였다. 시 주석은 이날 자신의 신(新) 실크로드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과 이를 뒷받침하는 AIIB 창설에 "국제사회가 보편적으로 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AIIB 참여를 원한다는 메시지로 풀이됐다. 이에 대해 아베 총리는 "일본은 아시아 지역의 인프라 투자 수요를 알고 있다. 중국과 AIIB를 토의하겠다"고 화답했다. 베이징 외교 소식통은 "중국이 역사라는 '명분'보다 AIIB라는 '실리' 앞에서 역사·영토 문제와 경제·외교를 분리하는 '투 트랙' 전술을 쓰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 인민대 왕이웨이(44) 국제문제연구소장은 최근 AIIB의 최대 단점으로 "일본이 참가하지 않은 것"을 꼽았다. 그는 "세계 3위 경제 대국인 일본의 불참은 AIIB의 국제적 대표성에 문제가 된다"고 했다. 일본의 AIIB 참여는 미국의 '아시아 복귀' 전략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전망이다.

청샤오허(成曉河) 인민대 교수는 이날 인터뷰에서 "중·일 정상의 이번 회동은 작년 말 APEC 이후 중·일 관계가 계속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상황의 연장선"이라고 말했다. 실제 양국은 이달 초 국회 간 교류를 3년 만에 재개하는 등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왔다. 지난달에는 리리궈 중국 민정부장(장관)이 방일했다. 리커창 총리가 지난 14일 베이징에서 고노 전 일본 관방장관을 만나 "중·일 간 곤란한 상황을 개선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역사·영토 문제에서 한국만큼 일본에 적대적이던 중국이 이처럼 유화적 태도를 보임에 따라 한국의 고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재 한·중 간에는 미국 고고도미사일 방어 체계(THAAD·사드)의 한반도 배치라는 '시한폭탄'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고 있다.

중·일 관계 개선이 일본에 가져다주는 실리도 크다. 우선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다. 작년 11월 중·일 정상회담이 성사된 이후 엔저 현상까지 겹치면서 일본을 찾는 중국 관광객이 급증했다. 작년 한 해에만 220만명이 일본을 다녀갔다. 중국 주도의 AIIB와 관련, 일본 재계는 "광대한 아시아 인프라 시장에서 일본만 소외될 수 있다"며 일본의 참여를 촉구해왔다.

☞반둥회의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자와바라트주의 주도(州都) 반둥에서 아시아 23개국과 아프리카 6 개국 대표들이 참가해 식민주의 종식과 비동맹 중립을 선언한 다자회의다. 국제사회에 '제3세계'의 등장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연례행사로 자리잡지는 못했지만, 이후 10년마다 아시아·아프리카 정상 및 고위 각료들이 참석하는 대규모 회의가 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