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 제가 피고인을 용서했는데 뭐가 더 필요합니까? 합의서도 제출했으니까 이걸로 재판을 끝내주세요."

피고인 A씨로부터 두들겨 맞아 전치 4주의 늑골골절상을 당한 피해자 B씨는 최근 재판부에 재판을 끝내달라고 요청했다. A씨에게 맞아 늑골골절상을 입은 것은 사실이나 충분한 치료비를 받고 A씨와 합의했으니 이 사건을 없던 것으로 해 달라는 것이다.

TV 드라마를 보면 싸우다가 결국 파출소까지 간 두 남자에게 경찰관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합의하세요." 그렇다면 '합의를 한다'는 것은 사건이 종결된다는 뜻일까? 당사자들끼리 화해를 하면 재판이 종결되는 민사재판과는 달리, 형사재판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를 한다고 꼭 재판이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서로 주먹을 몇 대 휘두른 정도로 싸운 경우 서로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사건은 종결된다. 폭행죄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처벌해달라고 해야 처벌이 가능한데 '합의를 했다'는 것에는 가해자의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다치게 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 법은 폭행죄, 협박죄, 명예훼손죄 등의 경우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상해죄는 이 항목에 들어가지 않는다.

B씨가 사건을 없던 걸로 하고 싶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다. 다만,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서 판사가 관대한 처벌을 내릴 수는 있다.

이와 같이 형사재판에서 피해자와의 합의는 처벌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하기도 하고, 처벌 강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피고인들은 처벌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라도 피해자와 합의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합의서가 제출되었다고 해서 재판부가 무조건 관대한 처벌을 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피해를 변상했는지, 합의에 이르게 된 경위는 어땠는지 등을 꼼꼼히 검토하기 때문이다.

사기죄 같은 범죄에서 피해자는 '돈을 갚겠다'는 약속만 믿고 합의서를 작성해 주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아직 돈을 갚은 게 아니기 때문에 합의서를 제출하더라도 양형에 별로 참작되지 않는다.

성폭력범죄 같은 경우 피해자가 정말로 피고인을 용서한 것인지, 아니면 피고인의 끈질긴 부탁에 마지못해 합의서를 제출하는 것인지 등 합의 과정을 살핀다. 결국 피해자와의 합의가 '만능 해결사'는 아닌 것이다.

지난 3월 31일 '세탁기 고의 파손 논란'으로 소송에 나섰던 삼성과 LG가 "법적 분쟁을 모두 끝내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명예훼손죄는 합의를 할 경우 재판을 끝낼 수 있으나 재물손괴죄와 업무방해죄는 그렇지 않다. 합의 여부와 관계없이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이 오는 17일 열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