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이정재·하정우가 주연하는 '암살'(감독 최동훈), 연산군을 쥐락펴락한 간신들의 시대를 풍자하는 '간신'(민규동), 사도세자를 재조명하는 '사도'(이준익), 윤동주의 삶을 그리는 '동주'(〃), 최민식이 호랑이 사냥꾼으로 변신하는 '대호'(박훈정), 시골 마을의 사건을 따라가는 '곡성'(나홍진), 이병헌·전도연이 호흡을 맞추는 '협녀'(박흥식),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 '옥자'….

간결하다. 개봉을 앞두고 있거나 제작 중인 한국 영화 기대작들은 유난히 두 글자 제목이 많다. 지금 극장에도 임권택 감독의 '화장', 300만 관객을 바라보는 '스물'이 걸려 있다. 채윤희 올댓시네마 대표는 "'동갑내기 과외하기'처럼 이야기를 선명하게 압축해야 좋은 제목인데 요즘 대세는 두 글자"라고 말했다.

왜 두 글자인가

제작진과 배급사는 개봉 2~3개월 전까지도 제목을 고민한다. 한석규·전도연 주연의 멜로 '접속'은 흥행이 됐으니 망정이지 당초 "간첩 영화 같다"는 불신에 시달렸다.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는 "누가 용의 발톱을 보겠느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기억하기 쉽고 영화의 느낌을 한 방에 일러주며 인지도를 높여야 좋은 제목이다. '감시자들'은 원래 '감시'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감기'가 나오는 바람에 혼돈을 피하려고 글자 수를 늘렸다. '끝까지 간다'는 당초 '무덤까지 간다'였으나 세월호 사건이 터져 제목을 바꿨다. '과속 스캔들'은 '과속 3대', '수상한 그녀'는 '그녀가 돌아왔다', '7번방의 선물'은 '12월 23일'이 될 뻔했다.

'쉬리' '친구' '괴물' '마더' '박쥐' '밀양'이 증명하듯이 두 글자 제목은 한국 영화 전통의 강자다. 2012~13년엔 '댄싱퀸' '도둑들' '신세계' '베를린' '변호인' '용의자' 등 세 글자 제목이 유행한 적도 있다. '스물'에 대해 박준경 NEW 본부장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젊음의 행진'이었고 '놈놈놈' '바보들의 행진'과 끝까지 경합하다 선택됐다"며 "SNS시대에는 제목이 짧을수록 소비·소통이 원활해지고 극장 창구에서 말하기도 편하다"고 설명했다.

'두 글자'의 흥행 파워

지난해 1월부터 올해 4월 6일까지 100만 관객을 넘긴 영화 56편 중 두 글자 제목이 붙은 한국 영화 5편(역린·표적·명량·해무·스물)은 평균 557만명을 모았다. '명량'(1761만명)을 빼면 평균치가 257만명으로 낮아지지만 이 또한 쉽게 넘볼 수 없는 숫자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 '군도: 민란의 시대'등 대중에게 앞의 두 글자로만 기억되는 영화까지 합칠 경우 흥행 파워는 훨씬 강력해진다.

영화시장 분석가 김형호씨는 "이 기간에 한국 영화 제목은 두 글자, 네 글자, 여덟 글자 순으로 관객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세 글자나 여섯 글자 제목은 대체로 성적이 나빴다. 외화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를 비롯해 열 글자 제목이 두 글자 제목보다 2.8배 많은 관객을 모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형호씨는 "한국 영화는 두 글자 단위로 입에 달라붙는 제목이 인지도를 높이는 데 유리하고, 외화는 부제를 달거나 제목이 길더라도 텍스트 자체가 이미지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 부제를 쓴 영화는 그렇지 않은 영화보다 관객 수가 더 많았다.

외화 제목은 더 길다

외화 제목은 셈법이 다르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처럼 길게 풀어 인지도를 높이는 전략도 쓴다.'비긴 어게인'은 원제의 느낌이 좋아 그냥 간 경우다. 시리즈물도 '어벤져스2'가 아니라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으로 붙여 새로운 기대를 갖게 만든다.

우리는 일상에서 '전화' '회사' '저녁'처럼 두 음절로 된 단어를 가장 자주 만나고 거기에 익숙해져 있다. 국립국어원 자료를 보면 두 음절 표제어가 14만1765개로 가장 많고 세 음절(12만1368개), 네 음절(10만2895개) 순이었다.

송강호 주연의 '사도' 후반 작업을 하며 '동주'를 촬영 중인 이준익 감독은 "우연의 일치일 뿐 두 글자를 의식하진 않았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대중에겐 '사도세자'라는 말이 더 익숙하지만 '사도'라고 하면 덧씌워진 직책을 걷어내고 개인으로 다가갈 수 있다. '윤동주'보다는 '동주'라고 해야 덜 딱딱하고 그가 가진 어떤 부끄러움의 미학이 전달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