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혁 정치부 기자

미국을 방문하는 외국 지도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 영예인 '연방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은 전적으로 하원의장이 성사 여부를 가른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지난달 초 연설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민주당은 물론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나서 "네타냐후의 의회 연설은 양국 관계를 파괴할 것"이라며 공개 반대했지만 공화당 소속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따라서 미 의회 연설을 추진하는 각국 정부는 하원의장 로비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2년 전 박근혜 대통령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베이너 하원의장실은 박 대통령의 연설 요청에 난색을 보였다. "바로 직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연설했다. 특정 국가에 두 번 연속 기회를 준 전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우리 대사관은 친한파 의원을 총동원하고, 막판에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까지 움직여 베이너 의장을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박 대통령 연설을 성사시켰다. 외부에는 '핵심 동맹 한국에 대한 미국의 특별 대우'로 포장됐지만 이는 미국이 알아서 준 게 아니라 우리가 발바닥에 땀 나게 뛰어서 얻어낸 것이었다.

미 의회가 이달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방미 때 의회 연설 기회를 준 것을 놓고 외교가가 시끄럽다. 일각에선 이를 '한국 대미(對美) 외교의 실패'로 규정한다. "왜 우리 외교관들이 이를 저지하지 못했느냐"는 비난도 나온다. 하필 가장 퇴행적 역사 인식을 갖고 있는 아베가 일본 총리 최초로 이런 영예를 누리는 게 우리로서 달가울 리 없다.

하지만 연설 성사만 가지고 '일본의 성공=한국의 실패' 등식을 들이미는 것은 좀 지나친 듯싶다. 일본 역시 베이너 의장에게 '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방위적 로비를 폈다. 베이너가 이를 받아들인 것을 '워싱턴이 한·일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고 해석할 근거는 없다. 언론이나 시민 단체가 아닌 정부 차원에서 남의 나라 정상 연설을 '육탄 저지'하는 것은 애초부터 외교 목표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전략은 오히려 '한국이 너무한다'는 역효과를 냈을 가능성이 크다. 한 전직 외교관은 "한·일전도 아니고 다른 모든 경기까지 일본이 지도록 뭘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한국 대미 외교의 진짜 성패(成敗)는 아베의 의회 연설 성사 여부가 아니라 연설 내용과 이에 대한 미국의 사후 평가로 따져야 한다. 미 의원들이 사전에 일본 측에 '연설을 계기로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 등에 대해 진정성 있는 반성·사과 입장을 밝히라'는 메시지를 보내면 과거사와 관련한 아베의 연설 발언 수위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얼마나 많은 의원이 얼마나 강한 압박을 넣느냐는, 그동안 과거사와 관련한 우리 논리가 미 조야(朝野)에 효율적으로 통했는지를 판가름하는 잣대다. 아베가 과거사 문제를 어물쩍 넘겼을 경우 워싱턴의 비난 수위도 그동안 우리 외교가 기울인 노력에 비례할 것이다. 한국 대미 외교의 적나라한 성적표가 공개되기까지는 이제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