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

지난해 7월 현직에서 물러나니 시간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주변의 퇴직한 분들과 만나게 된다. 모두 한마디씩 한다. "놀지 마라. 그동안 쌓아온 전문성이 아깝다." 한편에서는 "이제는 남편 버는 것으로 놀며 살아라" "주부라는 직업이 있지 않으냐?" 등등 다양하다. 나도 퇴직 남성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퇴직은 평생 해온 일을 그만두는 것이지만 새로운 일을 할 기회이기도 하다. 누구 하나 그냥 노는 분은 없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고 있었다. 공통점은 또 있다. 생활의 중심이 가족으로 변한다.

R은 아내와 함께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자유를 누리고 있다. 6개월간 벌써 10여 개국을 다녀왔다. 한국에서도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난다. 숙소 예약도 필요 없다. 가방만 들면 된다. 지방에 가면 5만원 내외의 좋은 숙소가 많기 때문이란다. 현직에 있을 때 수만명을 지휘하던 L은 이제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가사를 돕는다. 요리가 이렇게 보람 있고 즐거운 줄 미처 몰랐단다. 다음에는 김치에 도전할 계획이다. 작년 지방선거에서 아깝게 떨어졌던 P는 선거에 다시 나갈까 말까 고민 중이다. 아내를 울리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서다.

퇴직 후 펴낸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라는 책을 읽은 남자 지인들의 반응이 재미있다. "나도 빨리 '남자의 자리 아빠의 자리'를 써야겠다"며 농담 반 진담 반 말한다. 그 속엔 아빠도 엄마 못지않게 부성애가 있고, 직장 생활 힘들게 했는데, 아내도 사회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섭섭함이 묻어 있다. 아마 책이 나온다면 평생 가족들을 위해 견뎌낸 내용이 대부분이리라. 그 얘기를 들은 남편이 제목 저작권을 빨리 등록하라고 농을 던진다.

대부분 전업주부인 내 친구 남편들도 나이가 나이니만큼 거의 퇴직했다. 요즘 친구들 만날 때 빼놓지 않고 건네는 말이 있다. "남편에게 잘해 줘라. 한국 직장 치열하고 너무 힘들어. 세끼 집에서 밥 먹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대신 이렇게 얘기해봐. '여보, 평생 일했으니 이제는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면서 살아요.' 무척 좋아할 거야. 나도 그랬거든. 내가 퇴직한 날 남편이 한 말도 바로 그 말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