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진화를 통해 뇌가 점점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뇌의 크기가 얼마나 커졌을 때 인간의 존엄성이 생겼을까요. 이건 과학 문제일까요, 도덕 문제일까요. 여러분은 앞으로 이런 질문들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겁니다."

서울 은평구 하나고등학교 2학년 교실. 지난 10일 이효근(47) 교사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국어, 수학 등 정해진 과목을 교과서대로 배우는 것이 당연한 학교 교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올해부터 하나고 2학년 학생들이 매주 두 시간씩 듣는 이 과목은 '빅히스토리(Big history)'. 한국어로는 '거대사(巨大史)'라고 부른다. 국내 고교에서 빅히스토리를 정규 과목으로 채택한 것은 하나고가 처음이다.

빅히스토리 수업을 정규 과목으로 도입한 하나고 이효근(왼쪽) 교사와 김한승 교사는 “빅히스토리는 인간의 역사뿐 아니라, 빅뱅 이후 탄생한 모든 것의 역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하나고의 빅히스토리 수업은 과학 담당인 이 교사와 사회과 김한승(41) 교사가 함께 진행한다. 전혀 다른 과목을 맡고 있는 교사가 힘을 합쳐야 하는 빅히스토리는 어떤 과목일까.

이 교사는 "흔히 얘기하는 역사(歷史)는 문명의 발상부터 시작하지만, 빅히스토리는 137억년 전 우주 빅뱅(대폭발)부터 시작한다"면서 "모든 것의 역사를 찾아서 연결짓는 것이 빅히스토리"라고 설명했다. 잠시 후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나가 우주의 연대기(타임라인)를 함께 그렸다. 한 걸음을 1억년으로 하면 지구는 빅뱅부터 91걸음을 걸어야 나타난다. 거기서 20걸음을 더 걸어야 생명이 탄생하고, 인간과 문명은 마지막 한 걸음 사이에 다 모여있다. 학생들이 직접 빅히스토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활동이다. '생명은 왜 성(性)을 탄생시켰나' '인간은 왜 꼭 죽어야 하는가' 등 '빅퀘스천(거대질문)'에 대한 답도 탐구한다.

"예를 들어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의 경쟁에서 뒤처져 멸종했어요. 기존 교육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의 모습과 멸종한 시점만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5분이면 되죠. 빅히스토리 과목은 달라요. 2시간에 걸쳐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지역과 기후, 사회적 특성까지 배워 왜 현생인류에게 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파고듭니다."

수업의 핵심은 학생들의 호기심과 탐구심이다. 박도은(17)양은 "수학이나 과학 문제를 풀고 공식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이충석(17)군도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1989년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크리스천 호주 맥쿼리대 교수가 처음 주창한 빅히스토리는 미국·호주 등에서 이미 활발히 보급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도 전폭 지원한다. 한국에 빅히스토리가 도입된 것은 2009년 고(故) 조지형 이화여대 교수가 지구사연구소를 설립하면서다. 이 교사와 김 교사도 지구사연구소 교육에 참여하면서 빅히스토리를 접했다.

이 교사는 "통섭(統攝), 융합 등 학문 간 장벽을 허물기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항상 구호에 그쳤다"면서 "그런데 빅히스토리를 통해 다양한 학문을 동원해 문제를 푼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됐다"고 했다.

현재 서초고·풍문여고·대원국제중·성수중·상암중 등에서는 빅히스토리를 방과후 과목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나고의 실험이 성공하면 다른 학교로 전파될 가능성이 크다. 하나고에 문의해오는 다른 학교 교사들 중에는 '모든 것의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김 교사는 "기존 수업이 패키지 여행처럼 가이드(교사)가 정해준 대로 따라다니는 수업이었다면, 빅히스토리는 배낭여행법을 알려주는 것"이라며 "교사가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자세만 가지면 누구나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