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미국은 금빛 오스카 트로피의 주인공을 찾는 아카데미 시상식으로 불타오른다. 세계 200여 개국 생중계, 미국 내에서만 4370만명 시청, 30초짜리 중간 광고 가격이 190만달러(약 20억원)나 되는 소문난 잔치다. 할리우드의 이름난 배우라도 후보에 올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까다로운 이곳에 '한복(韓服)'이 정식 초청을 받았다.

20일 로스앤젤레스 글렌데일에 있는 MGN 파이브 스타 극장, 의상 디자이너 제니퍼 목(목플러스), 김문경(필월 우리옷), 조진우(한국의상 백옥수), 조영기(천의무봉), 오인경(이노주단) 5명이 지은 한복 37벌이 영화관을 달궜다. 이틀 뒤 열리는 공식 시상식에 앞서 영화 관계자와 배우들, 현지 정·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할리우드 트리뷰트 행사에서 한복 패션쇼가 열린 것이다. 주제는 '색동: 한국의 색에 동요되다 in Oscar'. 미국 기업체 협의회(US Business enterprise Council)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복진흥센터(센터장 최정철) 주관, 제니퍼 목이 총연출을 맡았다.

20일 오후 8시(현지 시각)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전행사로 마련된 한복 패션쇼에서 디자이너 제니퍼 목은 색동으로 여성의 몸을 감싼 한복 드레스를 선보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제니퍼 목은 원래 웨딩드레스 디자이너. 3년 전 아카데미 관계자에게서 의상을 보여달란 청을 받았다. "세계인의 눈과 귀가 쏠리는 자리라면 우리나라 고유의 옷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취지에 공감한 한복진흥센터가 한복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줄 한복 디자이너 4인을 추가 섭외해 힘을 보탰다. 전민정 한복진흥센터 진흥팀장은 "아카데미 시상식은 명품 디자이너들이 펼치는 세계 최고의 마케팅 현장"이라면서 "배우들이 착용한 건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완판 행렬을 이루는 만큼 한복을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8시 극장 앞 야외 정원에 레드카펫 대신 30m 길이 색동카펫이 깔렸다. 이브닝드레스를 즐겨 입는 미국인들 취향에 맞춰 두루마기와 치마를 한 벌의 드레스로 바꾼 제니퍼 목의 의상이 맨 처음 등장했다. 이어 3대째 가업을 이어받아 전통의 선(線)과 맵시가 충실하게 살아 있는 한복을 만드는 조진우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한국 복식 전승 전문가인 김문경은 천연염료(染料)를 다루는 솜씨가 빼어나다. 겨자색·쪽빛·팥색· 복숭아색으로 곱게 물들인 치맛자락이 카펫을 스칠 때마다 보는 이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9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 전수장학생에 뽑힌 조영기의 한복은 파티나 모임, 직장에서도 입을 수 있을 만큼 세련된 장옷 스타일이었다. 사회자가 객석을 향해 "한국인의 얼과 혼이 고스란히 담긴 옷"이라고 소개하자 "브라보!" "원더풀!"이 날아들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알록달록한 조각보를 소매 단에 이어 붙여 화사함을 뽐내는 한복 드레스, 속이 비치는 까만 천에 꽃을 수놓아 여성미를 살린 드레스, 장옷을 서양식 가운처럼 덧입은 한복, 노란 저고리와 하늘색 치마가 우아함을 더하는 전통 한복.

현지인들은 한국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정교한 바느질, 부드러운 옷감, 한쪽만 둥글게 부풀려 옷고름을 매는 법, 옷에 새긴 모란과 나비, 글자 복(福) 등에 관심을 보였다. "아주 얇은 실크 견직물을 어떻게 1㎜ 간격으로 올곧게 바느질하나?" "미국 옷은 합성섬유나 면이 대다수인데 한복 천은 종류도 가짓수도 천차만별이다." 할리우드에 사는 릴리아(38)씨는 "까만색 속 비치는 당의가 특히 갖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고 했다.

패션쇼의 피날레는 강강술래. 쇼를 끝낸 모델 20명은 손에 손잡고 무대를 휘휘 돌며 단아하면서도 활력 있게 움직이는 한복 미(美)의 절정을 보여줬다.

22일 오후 3시(현지시각)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원로배우 샤론 패럴은 드레스 대신 최초로 제니퍼 목이 디자인한 한복을 입고 레드카펫에 선다. 패럴은 이소룡을 할리우드로 데려와 스타로 만든 주인공. 그는 "내 나이 올해 일흔다섯"이라며 "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카데미 시상식을 한복과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