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쇄 살인사건’,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이형호군 유괴 살인 사건’…. 국민의 공분을 샀지만, 끝끝내 범인이 잡히지 않은 채 공소시효가 지나버린 장기 미제(未濟) 사건이다. 16년 전 발생한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적절했는지 가려달라는 재정신청이 최근 기각되면서 이 사건 역시 사실상 풀리지 않는 영구 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보통 경찰은 살인·강도 등 사회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사건의 경우 6개월 이상, 방화·강간 등은 3개월 이상 수사해서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면 3년 정도 사건을 붙들고 있다가 미제 사건으로 편철한다고 한다. 6일 경찰청에 따르면 이같은 미제편철 사건은 2010년 20만6647건(전체 사건의 12.68%), 2011년 21만1060건(13.59%), 2012년 25만4457건(15.58%)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

2004년 3월 26일 대구 성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실종 13년 만에 영결식을 가진 '개구리소년' 5명의 영정을 들고 학교 교정을 돌고 있다.

살인·살인미수, 강도, 강간, 방화 등 주요 강력범죄의 경우엔 더 크게 늘어난다. 2003년 강력범죄 미제 사건은 1049건(5.1%)이었는데 2012년 미제 사건은 4401건(16.4%)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같은 미제 사건들은 장기간 해결되지 않은 채 있다가 공소시효가 끝나 영구적인 미해결 사건으로 남는다. 미제 사건이 증가하는 이유는 뭘까. 장기 미제 사건을 다뤘던 베테랑 전·현직 수사관들에게 들어봤다.

“‘공소시효’가 미제 사건 수사 발목 잡는다”

본지가 만난 베테랑 수사관 4명은 모두 “공소시효가 미제 사건의 발목을 잡는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지방경찰청 장기미제사건 수사전담팀에서 2년간 근무했던 이치수 경감(현 경기 광명서)는 2013년 11월 24일, 공소시효 만료일을 25일 남겨두고 15년 된 살인사건을 해결했다.

1998년 12월 20일, 신모(여·당시 43세)씨는 내연남과 짜고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꾸며 전 남편을 살해했다. 장기미제사건 수사전담팀이 생겨 이 사건을 재수사하지 않았더라면, 신씨는 죗값은커녕 피해자의 보험금으로 평생 떵떵거리며 살 뻔했다. 이 경위는 “당시 공소시효는 다가오는데 증거가 안 나와 미치고 펄쩍 뛸 것 같았다”며 “이 사건은 극적으로 공소시효 전 범인을 잡았지만, 다가오는 공소시효 앞에 속수무책으로 놓을 수밖에 없는 미제 사건이 너무 많은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1991년 3월 서울 강남병원에서 진행된 이형호군 장례식. 그의 죽음은 아직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11년간 풀리지 않았던 ‘시신 없는 살인사건’, 8년간 미제로 남아 있던 ‘석촌동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한 서울 광진경찰서 엄재광 경위 역시 공소시효가 미제 사건 해결을 막는 걸림돌이라고 했다. ‘시신 없는 살인사건’은 2000년 강원도 한 공장에서 직원 3명이 사장을 살해한 뒤 땅에 묻었지만, ‘시신’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아 혐의입증에 애를 먹었던 사건이다.

엄 경위는 “공소시효 만료는 가까워지는데 시간은 자꾸 가니까 다들 사건을 포기했었다”며 “나 역시 여러 번 포기하려 했지만, 용의자가 마음에 걸려 계속 사건을 다시 봤다”고 말했다. 그는 “공소시효만 지나면 된다는 생각이 범죄자들에게 있기 때문에, 잡기가 더 어려운 것”이라며 “흉악범죄에 한해서는 공소시효를 아예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일선 경찰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장기미제사건 수사전담팀에서 근무했던 김근준 경정(현 경기 과천서)은 “과학수사기법이 계속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공소시효는 더욱 없어져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풀리지 않는 사건도 10~20년 뒤에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지문을 발견했는데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돼 있지 않았다”며 “외국인이 저지른 범죄라고 추정되는데, 이런 건은 시간이 지나면 풀릴 가능성이 큰데도 공소시효가 지나면 죄를 물을 수 없게 된다”고 했다.

“수사인력 부족, 성과압박에 시달려…미제사건은 창고 속에”

전담인력 부족도 문제로 꼽힌다. 익명을 요구한 퇴직 경찰 A씨는 “한 사건을 오래 잡고 있는 것은 성과를 요구하는 현 경찰 시스템에선 힘든 게 사실”이라며 “시간도 없고 사람도 없어 일선에서는 미제 사건을 대부분 창고에 쌓아놓고만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팀의 성과에 후배들의 진급이 달려 있기 때문에, 베테랑 수사관들이 미제 사건에 대한 미련이 남아도 쉽게 재수사를 시작하긴 어렵다”고 했다.

장기미제사건으로 남은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의 몽타주.

경기도 모 경찰서의 수사과 간부 B씨는 “일선 경찰서에서는 인력이 부족해 장기 미제사건에 손을 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며 “사회적으로 이슈가 돼서 수사본부가 별도로 차려지지 않은 미제 사건은 영구 미제가 될 가능성이 99%”라고 말했다. B씨는 “4대 악 척결 등 정부시책에 따라 초점을 맞춰야 하는 기획 수사가 늘어났기 때문에 5년 전, 10년 전 사건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며 “솔직히 미제 사건은 우연히 풀리면 ‘땡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매일 새로운 일이 떨어지는 일선 경찰에게 장기 미제 사건 수사는 무리”라고 했다.

현재 서울의 장기 미제 사건은 서울지방경찰청 산하 광역수사대에서 맡고 있다. 전담 인력은 총 11명으로, 작년 13명에서 2명이나 줄었다. 경찰청 관계자는 “11명이 수천 건의 미제 사건을 다루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