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스리랑카와 필리핀을 방문하며 연일 또 화제를 뿌리고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불교 사찰을 방문하더니 필리핀으로 옮기는 비행기 안에서는 최근 풍자만화로 촉발된 ‘샤를리 엡도’ 사건에 대해 “다른 종교에 대한 풍자도 도를 넘어선 안 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이에 앞서 우리 국민들의 이목이 다시 한번 교황의 입으로 쏠린 적이 있다. 지난 5일 새 추기경 명단을 발표할 때의 일이다.
이날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1월 중 새 추기경 명단을 발표하고 2월에 서임식을 갖는다. 새로 임명될 추기경 후보로는 인도네시아, 한국 등이 가능성 있다”고 보도한 것. 그러면서 두 나라가 거론되는 이유로 교세 성장을 들었다. 하지만 뚜렷한 취재원도 밝히지 않아 국내 천주교계 인사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소 뜬금없다는 반응이었다. 별로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외신이 언급한 가능성을 국내 언론이 대놓고 무시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국내 매체들은 자신들의 ‘희망사항’까지 담아 몇몇 교구장의 실명을 거론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이날 오후 8시(바티칸 시각 정오) 발표된 20명(교황 선출권 있는 만 80세 미만은 15명)의 새 추기경 명단에 한국은 없었고, ‘4번째 추기경 탄생’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 해프닝을 계기로 국내 천주교계에서는 당장 한국에서 새 추기경이 나오기 어려운 이유 3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추기경, 한국:일본 '2:0'
교황청이 보기에 한국은 분명 '관심 지역'이다. 아프리카 대륙을 제외하곤 전세계적으로 가톨릭 교세가 주춤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꾸준히 신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워낙 통계를 보수적으로 인용하는 가톨릭이라 아직 숫자가 집계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으로 한국의 신자는 또 늘었을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한국에 추기경 한 명 더’를 거론할 배경이 되기엔 약하다는 분석이다. 한국엔 이미 두 명의 추기경이 있기 때문이다. 1931년생인 정진석 추기경은 올해 만 84세로 교황 선출권이 없다. 그러나 교황청 추기경 명부엔 분명히 한국은 ‘2명’으로 잡혀 있다. 게다가 염수정 추기경이 새로 서임된 지 불과 1년이다.
아무리 한국이 예뻐도 1년만에 또 한 명을 임명하기엔 교황청으로서도 고려하고 배려해야 할 지역과 나라가 너무 많다. 지난 5일 임명된 추기경 중 카보베르데와 통가, 미얀마 등 3개국은 이번에 첫 추기경을 배출했다. 또 에티오피아, 뉴질랜드, 베트남, 태국 등이 포함됐고, 페루와 모잠비크엔 80세 이상 추기경이 임명됐다.
1943년생으로 올해 만 72세가 되는 염수정 추기경은 단순 계산으로도 앞으로 8년간 교황 선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미 ‘1표’를 확보한 한국에 1표를 더 얹어주기엔 교황청이 챙겨야 할 지역이 너무 많다. 당장 바로 옆 일본만해도 현재 추기경이 한 명도 없다. 일본은 작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확정 단계에 들어갔을 때 일본 방문을 위해 외교력을 총동원했음에도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추기경 배출과 교황 방한이라는 최근의 두 가지 메가톤급 외교전에서 일본은 한국에 완패한 셈이다.
◇지방 추기경?
천주교계에는 '추기경 좌(座) 교구'라는 말이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지만 그 교구의 교구장이 되면 거의 예외 없이 추기경이 되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톨릭의 본산이랄 수 있는 이탈리아의 경우 밀라노와 베네치아, 프랑스는 파리, 미국은 뉴욕 등이 이른바 ‘추기경좌’로 불린다. 한국의 경우도 김수환 정진석 추기경에 이어 지난해 염수정 추기경까지 3명의 추기경이 모두 서울대교구에서 배출됐다. 한국의 경우도 서울대교구가 ‘추기경좌’로 자리를 잡아가는 분위기다.
서울대교구장인 염 추기경이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로 추기경이 임명된다면 당연히 지방 교구장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천주교계에서는 서울대교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는 지적이 있다. 147만명에 이르는 신자 수도 압도적으로 많을뿐 아니라 영향력 등 모든 면에서 서울대교구는 한국 천주교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서울대교구장은 평양교구장 서리를 당연직으로 겸하고 있다. ‘침묵의 교회’인 북한 지역의 대표성까지 서울대교구가 맡고 있다.
워낙 국내외의 관심이 서울대교구로 쏠리다보니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오히려 지방 교구가 더 힘을 얻는 분위기다. 기울어진 균형을 맞추는 셈. 또 서울대교구가 한국 천주교의 맏형으로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가 많다면, 주교회의는 다소 진보적인 의견을 발표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지난 6년간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의장을 맡고,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가 산하 정의평화위원장을 맡던 시기엔 ‘4대강’ ‘제주해군기지’ ‘밀양송전탑’ ‘쌍용차’ 등 현안마다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고 대립각을 세워왔다. 반면 북한 인권 문제 등에는 침묵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 교구장 중에 새 추기경이 임명되면 그에게는 진보적 태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가능성이 높다. 또 새로 임명된 추기경 역시 그런 유무언의 압력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교황청 입장에서는 추기경 한 명 더 임명했다가 한국 교회를 두 쪽으로 갈라놓는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상식적으로 교황청이 이런 모험을 하는 것보다는 현재의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는 게 새 추기경 탄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의 두번째 이유다.
◇교황 대사 정년 넘어
마지막 세번째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현 한국주재 교황청 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는 올해 만 73세다. 2008년 부임해 올해로 서울 생활만 7년째. 천주교 사제의 정년 만 70세를 이미 2년 넘겼다.
교황대사도 외교관이다. 주재국에 근무하는 동안 ‘본국’에서 정상이 방문하는 것은 가장 큰 업무 중의 하나다. 올해 파딜랴 대사는 교황방한이라는 엄청난 행사를 치렀다. 그것도 교황이 대만족을 표현할 만큼 훌륭한 성과를 냈다. 대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난해 2월, 염수정 추기경이 서임식 참석을 위해 로마로 출국하던 날 인천국제공항 귀빈실. 염 추기경의 간단한 출국 인터뷰에 배석했던 파딜랴 대사는 참석 인원을 소개받다가 갑자기 반색을 했다. 대한항공 사장이 그 자리에 인사차 나왔던 것. 파딜랴 대사는 대한항공 사장에게 뭔가를 계속 물었다. 당시는 이미 가톨릭 내부적으론 교황 방한이 확정된 상태. 통상 교황은 로마에서 출발할 때는 알이탈리아항공, 로마로 돌아갈 때는 현지 국적기를 이용한다.
이때문에 교황의 귀국편 전세기를 섭외하던 중에 대한항공 사장을 우연히 만났으니 만난 김에 이런저런 조건을 맞춰보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막상 교황이 방한했을 때는 자신이 쓰던 침실을 교황께 내드리고 광화문 시복식과 아시아청년대회 그리고 마지막 서울 명동성당 미사까지 그림자 수행한 것.
게다가 작년에는 염수정 추기경을 탄생시켰다. 교황대사의 임무는 주재국의 상황을 다양한 루트를 통해 정확히 파악해 교황청에 보고하는 것이다. 여기엔 주교, 대주교, 추기경 후보군(群)에 대한 현지의 여론 수집 및 의견 전달도 포함된다.
이렇게 주한대사 6년만에 추기경 탄생과 교황 방한을 무사히 마친 그가, 또 정년을 이미 넘긴 그가 또다시 ‘새 성과’를 내기 위해 뛴다는 것은 무리라는 게 천주교계의 일반적 관측이다.
◇ 마지막 변수, 교황의 파격
이렇게 여러 조건들이 한국에 당장 새 추기경이 탄생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강력한 변수는 여전히 남아있다. 교황의 결심이다.
특히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거 교황들과 전혀 다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파격에 파격을 거듭할 수 있는 배경엔 그가 ‘바티칸에 빚이 없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탈리아 출신 부모 밑에서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교황청 근무 없이 현지에서만 사목하며 추기경까지 오른 그는 지난 2013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소집된 콘클라베에 참석할 때에도 이코노미석 왕복 비행기표를 끊어 로마로 갔다. 아르헨티나로 귀국한 후에 들어갈 양로원도 장만해둔 상태였다.
아무 욕심도 기대도 없었던 그였기 때문에 교황청에 이런 저런 인연이 많았던 전임 교황들과 달리 마음껏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 특히 ‘월가를 움직이는 최대의 큰손은 바티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베일에 싸였던 바티칸 재정 관련자들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가는 것도 프란치스코 교황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좁게는 바티칸, 넓게는 가톨릭 자체의 대변혁을 도모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 없이 ‘인적 쇄신’도 진행 중이다.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추진할 수 있는 인적쇄신 방식은 물갈이다. 전임자가 임기 만료됐을 때 자연스럽게 자기 사람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일단 일반인들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추기경 임명. 교황은 염 추기경이 임명되던 때에도 비유럽·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을 집중 배려했다. 그때는 자신이 교황이 된 후 첫 인사였다.
지난 5일은 두 번째 인사였다. 바티칸에 정통한 한 인사는 “이번 인사에서 추기경을 배출한 국가만 봐서는 교황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 없다”며 “나라뿐 아니라 어떤 교구장이 추기경으로 임명됐는지 유심히 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표적으로 든 예가 이탈리아였다. 이번에 새 추기경으로 임명된 이탈리아 교구장은 2명. 앙코나-오시모(Ancona-Osimo)와 아그리젠토(Agrigento)의 대주교들이다. ‘200년만에 추기경이 나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황청 권력에서 소외된 지역의 교구장을 새 추기경으로 택한 것. 교황은 겉으로는 ‘이탈리아 2명’이라는 명분을 주고, 내용으로는 다시 한번 교황청 주변 권력에 연연하지 말고 양떼 속으로 들어가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이런 파격의 교황이 ‘한국에 추기경 한 명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결심하면 앞에 열거한 이른바 객관적인 조건은 모두 없던 일이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 걸음, 한 마디에 세계의 이목이 쏠릴 수 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