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우리나라는 6·25전쟁 이후 2014년까지 62년 동안 경제가 줄곧 성장했다. 두 세대(世代)가 바뀌는 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해는 두 번뿐이다. 1980년 2차 석유 파동과 국내 정변(政變), 사회 혼란이 겹쳤을 때 경제가 처음 1.7% 뒷걸음질했다. 1998년 외환 위기 때는 마이너스 5.5% 성장이었다.

4·19혁명과 이승만 대통령 하야가 이어졌던 1960년은 2.3%,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1961년은 6.9% 성장률을 보였다. 거리에 최루탄이 쏟아지던 1987년은 12.5% 고도성장의 호황 속에서 민주화 홍역을 견뎌냈다. 그런 대한민국은 농업 국가에서 공업화 시대를 거쳐 정보화 국가로 진입 중이다.

그럼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까. 선진국 문턱을 넘었다는 증거는 적지 않다. 유엔 193개 회원국 가운데 경제 규모 순위는 10위권이고, 원조(援助)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베푸는 나라로 변신했다. 일부 과소비 행태는 선진국병(病)을 들먹일 수준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2년 8월 "오늘 67회 광복절을 맞아 우리 대한민국이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음을 확인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경제 전문가는 '선진국 문턱'이라고 한다. 문턱을 넘었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있다. 이렇게 주저하는 이유가 정치나 노동 분야의 후진성 때문만은 아니다.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거나 소득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진다고 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우리 경제는 선진국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흠결을 많이 안고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주인공 '덕수'가 달러를 벌기 위해 독일·베트남으로 원정 취업을 간다. 공업화에는 원유가 필수품이었다. 좋은 기계도 수입해야 했다. 에너지, 생산 설비, 기술을 들여오려면 외화가 절실했던 것이다.

해외 근로자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한국은행을 통해 정부가 통제했다. 정부가 외화를 독점하면서 수출을 독려하며 대기업을 키웠다. 외환 불법 반출에는 무서운 형벌을 때렸다. 정부의 외환 통제는 그렇게 영원히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 위기를 맞으면서 정부가 외환을 독점 관리하는 체제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오자 2차 외환 위기를 맞는다. 원화는 몇 달 새 31.3%나 추락했다. 싱가포르, 태국, 대만, 말레이시아, 필리핀은 통화 절하율이 10% 이내에 그쳤다. 정부가 미국에 통사정해 긴급 구제금융을 받고서야 위기는 끝났다. 대통령이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음을 선언'하기에는 부끄러운 소동이었다.

정부가 외환을 통제하면서도 원화를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도록 키우지 못한 것이 외환 위기를 자초했다. 그게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진즉 민간 금융회사들을 내보내 국제 금융시장에서 살아남도록 해야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올 들어서는 미국의 금리 인상을 앞두고 또다시 초대형 태풍이 몰려오는 전야(前夜)의 해안 부두처럼 전전긍긍하고 있다. 덕수들이 독일 탄광, 중동 사막에서 흘린 피와 땀, 눈물의 대가가 허망하게 증발하는 경제적 참사(慘事)를 여태 끊지 못하고 있다.

'꽃분이네'도 여전히 변신하지 못한 채 '덕수들 시대'에 머물러 있다. 영화 속 꽃분이네는 수입품 잡화상이다. 밀수품 또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외제를 파는 가게다. 규모가 영세하고 유통 과정이 불투명했던 터라 관세나 세금을 제대로 냈을 리 없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면세 혜택을 받는 거래였다.

이런 외제 잡화상이 정부 허가 사업으로 발전한 업태(業態)가 바로 면세점이다. 국내 면세점은 롯데와 삼성그룹이 8조원 시장의 83%를 장악하고 있다. 소수 재벌에 혜택을 몰아주는 구조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서 우리처럼 큰돈을 버는 면세점을 찾기는 정말 힘들다. 선진국이라면 아예 수입 제품 관세를 낮추는 선택을 하고 있다. 국내 소비자와 외국인을 차별하지 않고 브랜드 제품을 싸게 살 수 있도록 낮은 세금을 매기는 것이다. 외국인에게는 출국할 때 공항에서 세금을 돌려주는 나라도 많다.

선진국 행세를 하고 싶다면 면세점부터 사라져야 한다. 누가 어느 점포에 가더라도 갖고 싶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 나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국내 소비가 늘고 경제도 풀린다. 정부는 올해 국제수지 흑자가 1000억달러를 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많은 흑자를 낸들 그 혜택이 국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종마(種馬)를 아무리 개량해봤자 우승 말 열 마리가 끄는 마차가 자동차보다 빠를 수는 없다. 나라 형편이 피려면 말을 승용차로 바꾸는 점프가 필요하다. 이 땅의 덕수들은 소달구지에서 자가용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후계 세대는 '덕수 이후' '꽃분이네 이후'를 그리지 못하고 있다. 그저 영화 한 편에 감탄하며 그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아니면 폄하할 뿐이다. 유산만 축내고 있다는 핀잔을 들어도 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