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김영한 민정수석이 9일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과정과 이유가 납득하기 어렵다. 이날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에선 김 수석의 출석을 놓고 여야가 팽팽히 맞섰다. 국회 운영위는 청와대 비서실을 담당하는 소관 상임위이고, 이날 핵심 안건은 '정윤회 문건'으로 불거진 비선(秘線) 실세의 국정 개입 의혹이었다.

야당은 김 수석과 '문고리 비서관 3인방'으로 알려진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 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 비서관의 출석을 요구했다. 문건을 만든 곳이 다름 아닌 민정수석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실이었고, 문고리 3인방은 정씨 국정 개입 의혹의 핵심 연결 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운영위에는 김기춘 비서실장과 이재만 총무비서관만 출석했을 뿐 김 수석과 다른 2명의 비서관은 나오지 않았다.

야당이 이들의 출석을 거듭 요구하면서 결국 여당도 "민정수석실에서 벌어진 일인 만큼 김 수석의 출석이 필요하다"고 물러섰다. 여야 합의로 이같이 요구하자 김기춘 비서실장이 김 수석에게 국회에 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김 수석은 물러나겠다고 나섰다. 청와대 수석이 여야 합의와 직속상관인 비서실장의 지시까지 거부하는 초유의 항명(抗命)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검찰 출신인 김 수석은 작년 6월에 임명됐다. 문제가 된 '정윤회 문건'의 작성과 불법 유출 모두 김 수석이 취임하기 이전에 벌어진 일들이다. 그런 만큼 자신이 국회에서 이 문제로 야당 의원들의 질의와 추궁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김 수석이 직접 국회에서 민정수석실이 파악한 사건의 진상을 밝히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하는 것이 공직자로서 올바른 처신이다.

여당과 청와대는 당초 김 수석이 출석할 수 없는 이유로 '전례(前例)가 없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나 과거 정권에서도 민정수석이 수차례 국회에 직접 나왔던 적이 있었다. 김 수석은 이날 국회에 보낸 불출석 사유서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로서 긴급을 요하는 상황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둘러댔다. 청와대와 국회는 자동차로 30분 거리다. 국회에 나오기 싫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엉뚱한 핑계를 댄 것이다.

김 비서실장은 이날 문건 유출 사건에 대해 "비서실 직원의 일탈 행위로 인해 국민에게 걱정을 끼치고 비판을 받는 데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대단히 죄송하다"고 했다. 그러나 김 실장의 청와대 내부 기강(紀綱) 확립에 대한 다짐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허언(虛言)이 돼 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청와대 수석이 상관인 비서실장의 지시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김 수석 한 사람의 사표를 받는 것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청와대 문건 유출 사태에 이어 김 수석의 돌출 사퇴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은 공직 윤리도 무너지고 기강도 땅에 떨어진 상태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청와대 비서실을 그대로 두고선 이 정권이 내건 국정 과제를 제대로 추진하기 어렵다. 오히려 정권의 내리막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 대통령이 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법을 내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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