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고교 2학년에 올라가는 정모(17)군은 최근 고민 끝에 이과로 진로를 결정했다. 평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글쓰기를 좋아해 문과 성향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강하게 이과 선택을 권했기 때문이다. 정군은 "부모·선생님은 물론이고 주변 대학생 형들조차 '문과는 절대 가지 마라. 취직 못 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한때 '공부가 어렵다' '취직이나 출세가 힘들다'는 이유로 외면받던 고교 이과반에 다시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 특히 남학생과 중·상위권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 이공계 졸업생들이 각종 취업 지표에서 인문계 출신보다 선전(善戰)하는 데다 주요 대기업들이 이공계 중심으로 신입사원을 채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공계 기피는 옛말

학교 현장에서 '이공계 기피'는 이제 옛말이다. 서울 강남의 A고교는 올해 3월부터 고2 학생 13개 학급 중 10개를 이과반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이과반이 10개인 건 개교 이래 역대 최다다. 문과반은 3개로, 작년(4개)보다도 한 개 반이 또 줄었다.

이 학교 교장은 "5년 전까지만 해도 문과반과 이과반 비율이 8대 7 정도였는데 조금씩 역전되기 시작하더니 이젠 이과반 중심"이라며 "상위권 학생들은 의·치대 진학을 위해, 중위권 학생들은 대기업 취직을 위해 이과를 선호한다"고 했다.

서울 중동고도 한때 문과반이 이과반보다 더 많았지만, 지금은 12개반 중 8개가 이과반이다. 오세목 교장은 "대학들이 이공계 정원은 확대하는 반면 인문계 정원은 동결하거나 줄이고 있어 상위권 대학 진학도 이과가 더 유리하다"며 "특히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일수록 이과 선호 성향이 뚜렷하다"고 했다.

취업 시장에서 이공계 강세는 수년간 이어지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14년 2월 기준 인문계열 대졸자의 취업률은 45.9%였지만, 공학계열 대졸자 취업률은 66.9%로 전 계열에서 가장 높았다. 특히 삼성전자는 지난해 하반기 신입사원 공채에서 85%를 이공계로 채워 화제가 됐고, 현대차·LG·SK 등 주요 대기업도 신입사원 이공계 비율이 70~80%에 달한다. 현대차는 지난해부터 신입사원 채용에서 인문계를 아예 뽑지 않기로 해 논란을 빚었다. 이런 추세가 진로를 결정하는 고교 현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서울 시내 고2 문과·이과반 비율은 최대 7대 3까지 벌어졌지만 최근엔 그 차이가 줄어들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시내 고2 재학생 중 전체의 37%가 이과반을 선택해 5년 전보다 3.3%포인트 많아졌다. 반면 문과생은 전체의 61%로 최근 5년 사이 가장 적었다.

쉬워진 수능도 한몫

이 같은 '이과 쏠림 현상' 뒤엔 '쉬운 수능'도 한몫하고 있다는 것이 교사·학부모들의 얘기다. 과거엔 이과에서 배우는 수학·과학에 대한 부담 때문에 학생들이 기피했는데, 최근 수능이 쉽게 출제되면서 부담이 줄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치러진 수능에서도 이과생이 치른 수학B형의 만점자 비율은 4.3%로 문·이과 전 영역 중 가장 높았다. 고교생 자녀를 둔 학부모 유모씨는 "과거엔 애들이 수학·과학을 못하면 이과를 보낼 수가 없었지만, 이젠 수학·과학을 좀 못 해도 학원 가서 좀 보충하거나 EBS 강의를 열심히 들으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만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대학 진학과 취업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이공계 학생이 많아진다고 해서 이공계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며 "학생들이 자기 적성에 맞춰 진학을 결정해야 대학이나 사회에 나가서 중도 탈락하는 일이 없을 텐데 이런 점이 우려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