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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異國)에서 느끼는 고독과 설움은 100년 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 동아일보 조사부장 등을 역임한 김동성(1890~1969)은 한국 최초의 해외 특파원, 한국인 최초의 한영사전 편찬자,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 등 '최초' 기록을 수두룩하게 보유한 언론인이자 행정 관료, 번역가였다. 안재홍·이상협과 함께 '한국이 낳은 3대 기자'로 불렸던 그가 미국 유학길에 나선 건 1909년이었다.

멀리 보이는 뉴욕 마천루의 강철 빌딩과 석조 건물을 선상에서 바라보면서 그는 "구름 저편의 고산준령(高山峻嶺)"을 떠올렸다. 항구 입구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본 뒤에는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 모든 것이 놀라움이자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난생처음으로 고가도로와 지하로 다니는 차량 행렬, 경적 소리와 전차를 접한 뒤 반가움은 그만 당혹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넓은 바다의 물 한 방울에 불과했다. 도시의 소란스러운 간이식당의 소용돌이 안에서는 누구도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았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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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미주(米洲)의 인상(印象)'(김희진·황호덕 옮김, 현실문화)은 당시 미 유학생이었던 김동성이 삽화를 곁들여 1916년 미국에서 출간한 에세이집 '동양인의 미국 인상기'를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론'과 더불어 20세기 초 한국인이 미국에서 남긴 몇 안 되는 영문 출판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동안 일부 내용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여행기 전체를 완역(完譯)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의 정경(情景) 묘사와 이방인의 내면 고백에서 출발한 여행기는 20세기 초반 한국과 미국, 동양과 서양의 문명 비교론으로 점차 변모해간다. 미국의 대통령제를 보면서 "나라의 최고 책임자를 4년마다 선출하는 일이 가능하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고 놀라고, 지역마다 들어선 공공 도서관에 대해서는 "미국 문명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라고 감탄한다.

1908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 들어선 싱어 빌딩의 전경. 높이 187m의 47층짜리 이 빌딩은 당시 세계 최고층 건물이었다. 왼쪽 사진은 이듬해 미국에 도착한 유학생 김동성이 직접 그린 맨해튼 일대의 풍경. 이 삽화는 1916년 미국에서 출간된 ‘동양인의 미국 인상기’에도 실렸다.

유학생 김동성의 시선은 때때로 미국 현지인들보다 진취적이다. 미국 가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누리는 여성이 정작 투표권은 행사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그는 "참정권을 지금 당장 줘버리지 않는가? 아내가 연단에 올라가 있는 동안 (남성이)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 해도 말이다"라고 일갈한다. 그의 여행기가 출간된 지 4년 뒤에야 미국 전역에서 여성 참정권이 보장된 걸 감안하면, 당시 그의 주장이 얼마나 개방적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흡사 오늘날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그의 여행기에는 현대적 감각으로 무장한 구절들이 적지 않다. "일요일 오후면 교통사고가 너무나 많이 나기 때문에 많은 건수가 간과되어 보도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그야말로 제 무덤을 향해 돌진하는 셈"이라는 우울한 논평은 내일 자 조간신문에 실려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요컨대 진실한 여행기는 시공간적 한계마저 뛰어넘는 힘을 갖고 있다는 걸 이 책은 보여준다.

'미주의 인상'이 100년 전 선각자의 미국 여행기라면, '경성 에리뜨의 만국 유람기'(허헌·최승희·나혜석 등 지음, 성현경 엮음, 현실문화)는 1930년대 지식인 10여명의 세계 여행기를 묶은 책이다. 여직공과 두부장수 하루 일당이 30~40전에 불과했던 시절에 1000원에 육박하는 파리행 일등석 기차표와 330원의 샌프란시스코 일등석 배표는 분명히 엄두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천도교 등 종교 단체의 후원 등을 통해 지식인들의 유학이 붐을 이루면서, '삼천리' 같은 잡지에도 기행문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이 책에 실린 여행기들도 '삼천리'에 실린 기행문을 묶은 것이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스위스의 융프라우를 바라보면서 "우리나라도 강원도 일대를 세계적인 피서지로 만들 필요가 절실하다"고 간절히 희구(希求)한다. 독립운동가 안창호는 미국의 필리핀 통치에도 필리핀인들이 총독부의 고위직에 오르고 원주민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는 현실을 상세하게 전한다.

이처럼 선각자들은 일제의 혹독한 검열 속에서도 유럽의 신생 독립국 아일랜드나 인도의 반영(反英) 운동 소식을 통해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간접적으로 역설했다. 침묵을 강요당했던 시절에 기행문은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강렬한 무언(無言)의 외침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