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베니스는 르네상스 시대의 글로벌 도시였다. 이곳을 무대로 펼쳐지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는 유명한 판사가 나온다. 포샤(Portia)는 빚을 받겠다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살 1파운드를 떼어가라고 판결한다. 다만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샤일록은 욕심 많고 나쁜 사람의 대명사가 됐고 포샤는 정의(正義)를 바로 세운 명판사의 상징이 됐다. 여성을 위한 미국의 첫 로스쿨도 포샤로스쿨(뉴잉글랜드)로 명명됐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공무원과 개신교 목사들을 샤일록처럼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 만큼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포샤 숫자도 늘고 있다. 공무원은 높은 연금 혜택을 누리며 세금을 잡아먹고 있는 게 사실이다.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소득세를 내지 않으니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말릴 수는 없다.

많은 공무원은 닥칠 것이 닥쳤다고 말한다. 세월호 참사로 공무원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수능 시험마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관피아(관료+마피아)의 낙하산 인사를 막고 연금을 줄이겠다고 나오는 것을 정면 거부하는 공무원은 소수이다. 국민연금보다 혜택이 두드러지게 많다는 사실도 대부분 인정한다.

문제는 공무원을 걸림돌로 적대시(敵對視)하는 사방의 눈이다. 청와대나 집권당이 공무원연금 개혁을 연내 끝내겠다고 서두르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투에서 공무원들은 섬뜩한 기분을 느낀다. 마치 얄밉게 욕심을 부리는 샤일록의 친척쯤으로 묘사하는 게 싫은 것이다.

종교인 과세(課稅)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 천주교나 성공회 신부들은 소득세를 내고 있다. 불교는 실행하지는 않고 있지만 과세 방침이 결정되면 따르겠다는 입장이다. 개신교는 사정이 좀 복잡하다. 일각에서는 자발적인 납세운동을 벌이고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과세 방침에 반대하고 있다.

일부 대형 교회는 내분(內紛)으로 시끄럽다. 목사 자리를 대물림하면서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초대형 빌딩을 높이 올린 교회도 있다. 하지만 개신교 교회는 80%가 영세하다. 지방의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 가운데는 힘겨워하는 곳이 많다. 교회 규모나 목사 수입 수준에서 격차가 너무 크다. 일부 목사들이 과세 방침에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마치 모든 교회가 탈세(脫稅)하고, 그래서 정부 예산이 부족한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공무원·종교인들에게 YES나 NO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압박하는 것도 피 한 방울과 살 1파운드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과 다름없다. 공무원연금만 해도 이번에 정부·여당이 내놓은 방안대로 가더라도 몇 년 뒤에는 다시 고쳐야 한다. 어느 나라나 20년, 30년에 걸쳐 조금씩 고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공무원연금도 앞으로 20년 안에 국민연금과 똑같아지면 그것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번에 끝날 일이 아니라면 유연한 개혁안을 놓고 절충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종교인 과세도 단칼에 살점을 떼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그저 교회의 수입·지출을 국세청에 보고하도록 의무화했다가, 다음 단계에서는 재무 자료를 내지 않는 교회에는 면세(免稅) 혜택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종교인 과세로 예상되는 세금 수입은 몇백억원 안팎이라고 들린다. 중요한 것은 교회 장부의 투명성을 높이는 일이다. 세수가 당장 급하다고 순서를 밟아가며 해도 될 일을 한 번에 결론짓겠다고 덤빌 필요는 없다.

공무원 집단은 건국(建國) 이후 고도성장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를 이 자리까지 끌어왔다. 종교인들은 이념으로 분단되고, 빈부(貧富)로 갈라지고, 지역으로 분열된 나라에서 갈등과 마찰을 줄이는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국민 다수가 그런 공(功)을 인정했기에 그동안 세금 혜택 제공을 참아왔을 것이다. 이제 와 '당신들 시대는 끝났다'고 매정하게 몰아친다면 누가 이 나라의 공직을 맡고 누가 이 사회의 소금 역할을 하려 하겠는가.

시대가 바뀌면서 포샤 판사를 보는 눈은 달라졌다. 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살점을 떼어내라는 판결은 실행 불가능한 일이다. 실현될 수 없는 판결은 궤변이자 트집잡기식 오판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다수설(多數說)로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옳은 일을 하더라도 당사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결정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무원연금 개혁과 종교인 과세를 관두자거나 무작정 미루자는 말은 아니다. 당사자들도 공무원연금은 고쳐야 하고 종교인 과세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국민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느끼고 있다. 다만 공무원·목사들을 적(敵)으로 돌리면서까지 서둘러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