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연희로10길은 '하숙집 거리'로 불리던 곳이다. 연세대 서문으로 가는 길 좌우에 50여곳의 하숙집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이 거리에서 하숙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숙집 자리는 대부분 원룸과 편의점으로 바뀌었고 10곳 남짓 살아남은 하숙집들은 골목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19년간 하숙집을 했던 최미자(70)씨도 올해 초 하숙집 문을 닫았다. 15명을 받을 수 있는 최씨 집엔 9명의 하숙생만 남았다. 풀옵션 원룸과 값싼 기숙사 사이에 어정쩡하게 낀 하숙의 인기가 하락한 영향이 컸다. 하지만 최씨가 문을 닫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하숙 치는 재미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는 "저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요즘 하숙생들에게 나 자신을 맞추지 못 하겠더라"고 말했다. 마지막 메뉴는 된장찌개, 탕수육, 제육볶음이었다. 신세대 하숙생들도 그날만큼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5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10길의 한 건물 벽에 하숙생을 구하는 광고판이 붙어 있다. 하숙집 50여곳이 몰려 있어 ‘하숙집 거리’로 불리던 이곳은 하숙의 인기가 하락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오른쪽 건물과 같은 1인1실 식 원룸이나 편의점 등으로 바뀌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그렸던 시끌벅적하고 정감 넘치는 하숙집 풍경들이 사라지고 있다. 대학가마다 하숙집 간판도 찾아보기도 힘들어졌지만, 명맥을 유지하는 곳들도 그 풍경이 예전 같지 않다. 현실의 하숙집이 드라마와 가장 다른 점은 "엄마" "어머니" "형" 같은 호칭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고려대 앞에서 15년째 하숙을 치고 있는 김천수(69)씨는 "학생들이 집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어머니'에서 '아줌마'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금은 판·검사가 된 옛 하숙생들은 아직도 집사람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연락을 해오는데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라고 했다. 연세대 앞에서 20년째 하숙집을 하는 오순자(65)씨도 "10년 전 공인회계사 시험에 계속 낙방하다가 3년 만에 붙은 하숙생이 합격한 날 나를 껴안고 '어머니가 해주신 밥 먹고 합격했다'고 기뻐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오씨를 '엄마'나 '어머니'라 부르는 붙임성 좋은 학생은 거의 없다. 1993년부터 신촌에서 하숙집을 해온 고일순(58)씨는 "주인한테 인사도 안 하는데 형·아우는 무슨…"이라고 말했다.

주인 아줌마의 손맛을 맛보며 나누던 밥상머리 대화도 보기 힘들어졌다. 오순자씨는 "요즘엔 오로지 밥만 먹고 각자 방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16명의 하숙생 중 서로 인사하고 지내는 학생은 5명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어떨 때는 내가 민망해서 먼저 말을 걸기도 하는데 학생들이 싫어하는 눈치야. 그저 '밥 많이 먹어라' '요새 통 안 보인다'고만 하는데 대답도 잘 안 해요." 서울 동국대 앞 '길하숙' 전모(41)씨는 "요즘 하숙생들은 방에 들어가면 잘 안 나오고 혼자 게임을 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고시철이면 대학 하숙촌마다 '○○하숙집 ○○○ 사법고시 축 합격' 같은 플래카드가 붙었지만 하숙생들이 뭔 공부들을 하는지 모르니 그런 풍경도 거의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아침마다 다 같이 밥을 먹자며 깨우는 건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한 하숙집 주인은 "학생들 앞에선 말수를 줄인다"고 했다. "예전엔 늦잠 자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소리 질러 깨우는 일도 많았지만 이젠 그랬다간 큰일 난다"며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려대 앞 김천수(69)씨는 "크리스마스까지도 함께 지내던 하숙집이 이젠 잠만 자는 공간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신세대 하숙생들의 개인주의 문화는 하숙집의 구조도 원룸처럼 바꿔버렸다. 하숙집들은 생존 차원에서 합방(2~3인실)과 공동 화장실을 없앴다. 1인 1실은 기본, 침대에 전용 화장실, 에어컨까지 갖춘 '풀옵션'이 대세다. 고일순씨는 "다들 외둥이에 20년 가까이 혼자 방을 쓰면서 자란 대학생들이 무슨 하숙을 하겠느냐"며 "요즘 하숙집들은 '보증금 없는 원룸'"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앞 한 부동산업소 주인은 "예전엔 반찬이 잘 나오는지,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부터 따졌는데 요즘은 심지어 개인용 세탁기나 제습기가 있는지까지 본다"고 말했다.

그래도 빈방이 생기는 건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오순자씨는 "하숙을 한 뒤 처음으로 17개 방 중에 하나를 못 채웠다"고 말했다. 고일순씨도 하숙집을 연 이래 처음으로 올해 하숙비를 7만원이나 깎았다. 방이 비는 걸 보다 못해 내린 결정이었다. 하숙집에서 빠져나간 학생들은 원룸이나 신축 대학 공공 기숙사를 찾아간다. 연세대 2학년 김서희(21)씨는 "하숙집은 밥이 해결되니까 원룸에 비해 엄청 싼 편"이라며 "가난한 학생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20년 전 60곳이던 고려대 앞 하숙집은 20개로, 한창땐 40곳이 넘던 동국대 부근 하숙집도 이제 10곳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