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는 소멸하며 국가는 붕괴한다. 학설은 효력을 상실하며 기관은 영락한다. 그러나 작품은 살아남는다."

미술평론가 데이브 히키가 남긴 이 말은 아마 이 가문에 딱 들어맞는 말일 것 같다. 15세기부터 300여 년간 피렌체와 토스카나 지방을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며 네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던 메디치 가문 말이다. 18세기에 대가 끊긴 이 가문은 그들이 남긴 예술작품과 21세기에도 유용한 삶의 태도로 계속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폰토르모, ‘코시모 메디치의 초상화’, 1519~1520.

평민 출신의 메디치 가문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바꾸어 놓은 사람은 코시모 메디치(1389~1464, 재위 1434~1464)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작은 도시국가들이 군웅할거하며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상인이자 은행가였던 코시모는 평화야말로 국민적인 부가 창출되는 기본 조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쟁 대신 탁월한 외교술로 이탈리아 전체에 힘의 균형을 만들어냈다. 전쟁으로 인한 세비 부담을 없애고 경제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해내는 데 성공했다. 평민 출신으로 아무런 공직도 갖고 있지 않던 그에게 '공화국 수장'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으며, 사후에는 피렌체의 국부(國父)로 숭배받았다.

코시모는 "인도의 향료와 그리스의 서적을 종종 한배에 실어 수입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열렬한 학문 숭배자이자 예술 애호가였다. 학문과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시대를 변화시켰다. 코시모가 후원한 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로 성장했다. 그는 기성의 유명 작가들보다 젊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들에게 건축과 작품을 의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낯설고 새로운 것들에서 더 나은 것들이 자라나는 흥미로운 과정을 지켜보았다. 코시모의 방식에 주목한 경영학자들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분야를 접목하여 창조적·혁신적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기업 경영 방식'을 의미하는 '메디치 효과(Medici Effect)'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평소에 즐겨 쓰던 붉은 모자가 등장하는 코시모의 초상화는 그가 죽은 지 50년이 지나서 그려졌다. 그의 장자 가문이 대가 끊기자 방계 후손이 대를 이으면서 그를 기리고자 의뢰한 그림이다.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 코시모 메디치가 만들어 낸 '메디치 효과'는 피렌체를 넘어서 전 유럽의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 건축이다. 코시모의 전격적인 후원으로 젊은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는 1436년 16년 만에 높이 109m에 이르는 돔을 완공할 수 있었다. 돔의 건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브루넬레스키는 '선(線)원근법'의 원리를 발견했다. 선원근법은 르네상스 이후 500여년간 서양 회화를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시각적·철학적 원리가 되었다. 의도하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생산적인 결과가 얻어진 것이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1475년에 파올로 토스카넬리는 돔의 높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태양의 운동을 계측했다. 그의 실험은 천문항법 시대의 문을 열었고, 이는 1492년 인도를 향한 콜럼버스의 대항해의 근거가 되었다.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하여 식민지 개척을 시작함으로써 그를 후원했던 스페인은 서구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등극하게 된다. 돔의 건설에서 원근법의 발명, 그리고 콜럼버스의 항해까지 예기치 못한 생산적인 결과들의 연이은 도출, 이것이 바로 메디치 효과의 가장 긍정적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