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매력적이다. 폭력의 막장이 전쟁에 있다. 이 폭력은 최고의 정의와 최대의 악을 동시에 담는다. 피아가 명확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구분이 어렵기도 하다. 영웅이 있고 피폐해진 개인이 존재한다. 가족이 있고 국가가 있다. 결국, 전쟁의 한 가운데에 인간이 있다. 전쟁은 어쩌면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최상의 소재일지 모른다.

할리우드의 전쟁영화는 진화를 거듭했다. 미국 만세를 부르짖는 영웅 신화에서 가족 서사로, 전쟁의 폭력성 그 자체에 대한 반성에서 상처받은 개인의 실존적 문제로….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2010년 작 '허트 로커'나 조금 불명확한 부류이기는 하나 그가 지난해 선보인 '제로 다크 서티'는 현재 할리우드가 내놓을 수 있는 전쟁영화의 정점으로 볼 수 있다.

'퓨리'(감독 데이비드 에이어)는 '종합전쟁영화'다. 이 작품에는 전쟁영화가 다룰 수 있는 모든 게 담겨있다. 영웅 서사와 가족 서사가 더해지고 전쟁의 폭력성과 그 폭력의 피해자인 고통 받는 개인이 뒤섞여 있다. 또 한 가지, '퓨리'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매우 어설프다.

2차 세계대전 미국과 나치와의 싸움은 이미 미국 쪽으로 전세가 기울었다. 항복 선언만 남겨둔 나치는 마지막 항전을 이어간다. 탱크 퓨리를 이끄는 전차부대장 '워대디'(브래드 피트)는 동료를 이끌고 막바지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선으로 향한다. 아군의 보급로를 확보하라는 명을 받은 미국의 탱크부대는 불의의 습격을 받아 전멸하고 남은 건 워대디의 탱크 퓨리 한 대뿐. 워대디는 보급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건 전투에 나선다. 탱크 한 대로 수많은 적에 맞서는 것은 전형적인 미국식 전쟁영웅 이야기다. '퓨리'는 전투 중에 죽는 군인의 모습을 최대한 잔인하게 담는다. 뒤돌아보지 않고 전진한다. 전쟁의 적나라한 폭력성을 보여준다. 워대디의 동료는 모여 앉아 전쟁이 자신에게 준 정신적 피해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다. 미군이 독일 여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장면도 등장한다. 워대디는 전투 후 홀로 슬픔에 빠진다. '퓨리'의 러닝타임은 134분이다. 이 모든 것이 제대로 녹아들기엔 부족한 시간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담으려다보니 결국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 셈이 됐다. '퓨리'에는 연출 의도가 잘 보이지 않는다. 전쟁 자체를 이야기했다고 하기에는 전쟁에서 파생하는 소주제를 너무 가볍고 쉽게 훑고 지나간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고 철학적으로 깊이가 없기도 하다.

'퓨리'가 가장 집중하는 건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탱크 퓨리는 흡사 한 가족이 머무는 집처럼 보인다. 가족을 이끄는 건 워대디다. 그의 옆을 지키는 온화한 성격의 2인자 '바이블'은 어머니 역할을 한다. '고르도'는 믿음직한 장남이다. '쿤 애스'는 거칠지만 마음 따뜻한 둘째 아들, 신병 '노먼'은 잔인하지만 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막내아들이다. 아버지는 이 나약한 아들이 세상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래서 강하게 교육한다.

워대디는 노먼에게 "이상은 평화롭지만, 현실은 폭력적이야"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전쟁에 국한한 이야기는 아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삶 자체가 그러하다는 것을 관객은 잘 알고 있다.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은 이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워대디는 노먼을 '아들(Son)' 혹은 '애송이(Kid)'로 부른다. 그러다 마지막 전투에 나설 때 워대디는 노먼에게 '머신'이라는 워네임(War Name)을 붙여 준다. 어른이 됐다는 의미다.

가족과 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전쟁 속에 녹여내는 것 자체는 나쁜 선택이 아니다. 문제는 연출이다. 노먼의 변화에 개연성이 부족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퓨리'는 이 과정을 너무도 진지하고 심각하게, 노골적으로, 게다가 시종일관 신파적으로 다룬다. 이러다보니 심각한 이야기에도 심드렁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감정의 디테일을 쌓기보다는 성장영화의 공식을 따라가는 듯한 연출 방식에는 울림이 없다.

'퓨리'는 노먼의 성장을 '과시'하고자 모든 상황을 극적으로 짜맞춘 듯한 느낌을 준다. 워대디의 부대가 독일의 한 마을을 점령하러 갔을 때의 노먼의 에피소드뿐 아니라 영화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전투신마저 인위적으로 보인다. 충분히 후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전투에 나서는 워대디의 결정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퓨리'는 성공적인 드라마는 극적인 상황을 겹겹이 쌓아놓는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감정의 디테일을 차곡차곡 축적하는 게 관건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탱크를 이용한 전투 장면은 '퓨리'에서 가장 볼만하다. 탱크 한 대가 얼마나 유기적이고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지를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탱크 안의 다양한 무기와 이용 방법, 전투 방식이 구체적으로 제시돼 전쟁 영화를 보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워대디를 연기한 브래드 피트와 노먼을 맡은 로건 레먼의 연기도 좋다. 피트는 언제나 그랬듯이 성실한 연기를 보여준다. 남성성을 극대화한 인물에 온기를 불어넣는 그의 연기는 브래드 피트가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력 면에서도 할리우드 최고라는 것을 증명한다. 로건 레먼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배역을 맡았다.

"이상은 평화롭지만, 현실은 폭력적이야"라는 워대디의 대사를 다시 한 번 떠올린다. 퓨리가 한국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폭력적이지는 않겠지만 한국 관객은 누구보다 냉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