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 수석논설위원

'뉴라시아 원정대'가 지난 9월 모스크바에 들어간 날 러시아 전(全)고려인협회 조 바실리 회장이 말했다. "자전거로 모스크바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그는 한 달 전 고려인 자동차 원정대를 이끌고 러시아·중앙아시아·한반도 횡단을 해냈다. 그래서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 대장정'을 준비하던 조선일보 기획팀이 그에게 도움말을 청했었다. 그때 그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며 극구 말렸다고 실토했다. 그는 원정대가 베를린을 떠나 29일 만에 3000㎞를 달려왔다는 사실에 거듭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시베리아를 지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들 무모하다 못해 황당한 발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원정대는 베를린~모스크바의 다섯 배 1만5000㎞ 완주(完走)라는 진짜 기적을 이뤄내고야 말았다. 나흘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해항으로 들어온 일곱 라이더는 텁수룩한 머리에 검게 그을렸다. 여름에서 겨울까지 세 계절을 지나오면서 대륙의 태양과 모래바람이 남긴 흔적이다. 그래도 눈빛은 형형하다. 지친 기색이 없다. 원정대는 1만 시민과 함께한 마지막 라이딩 전날에도 철원에서 파주까지 117㎞ 길을 꼬박 자전거로 달려냈다. 민통선 안 'DMZ 체험관' 유스호스텔에 묵으며 판문점 근처까지 페달을 밟았다.

원정대가 온 길은 누구도 두 바퀴로 가지 않은 미답(未踏)의 100일이었다. 차 쌩쌩 달리는 준고속도로, 때로 차가 못 들어가는 숲길을 달렸다. 바퀴 빠지는 진창길을 안간힘 쓰며 가느라 흙탕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가슴 서늘하게 겁나는 순간도 많았다. 라트비아 관통하는 간선도로를 지날 땐 내내 비가 쏟아졌다. 드센 옆 바람이 불었다. 트럭들이 지나가며 일으키는 돌풍과 물보라에 자전거가 휘청였다. 몽골 국경에 접한 러시아 소읍까지 가던 날 144㎞ 길은 끝도 없는 오르막이었다.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한 페달질이 캄캄한 오후 7시 40분에 끝났다. 대원들은 "허벅지가 타는 것 같고 무릎에 감각이 사라졌다"고 했다.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 원정대원과 일반 시민의 자전거 행렬이 16일 경기 파주 임진각과 서울을 잇는 자유로 철책 옆을 달리고 있다.

시련보다는 감동의 순간이 더 많았다. 라트비아 리가에선 아카펠라 여인들이 불러준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 전율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아리랑에 뜨거운 박수와 함성을 터뜨렸다. 아침 물안개 채 걷히지 않은 러시아 볼가강변 야영장에서 보드카와 초코파이를 올려놓고 추석 차례를 모셨다. 남은 원정길을 무사히 열어주시라고 빌었다.

카자흐 북부 카멘노브로드에선 마을 사람들이 빵과 소금을 내놓는, 소박하되 따스한 대접을 받았다. 기우는 해를 뒤로하고 영하의 날씨 속에 한민족의 시원(始原), 바이칼호로 뛰어들었다. 몽골 초원에선 별 쏟아지는 밤하늘을 텐트 삼아 잤다.

한국 번호판 단 자동차가 유라시아 대륙을 달린다는 것도 유례없는 일이었다. 독일 함부르크항 하역부터 러시아·중국 입국까지 매번 통관 절차가 난관이었다. 그럴 때마다 원정대 지원팀이 머리 싸맨 끝에 뚫고 갈 방법을 찾아냈다. 무엇보다 모두가 무사히 돌아왔다. 서로 아끼고 배려하고 격려하며 힘을 합친 대원들 스스로의 마음 씀 덕분일 것이다.

김창호 박영석 김영미 황인범 안영민 이상구 최병화, 그리고 라이더들의 건강을 지켜준 팀닥터 이병달. 대원들은 이제 저마다 일상으로 돌아갔다. 산악인으로, 병원장으로, 일러스트레이터로, 카페 주인으로, 학생으로…. 매일 짐 꾸리고 풀고, 자전거 손보고, 비바람 속에 페달 밟으며 울고 웃던 100일의 일상이 아득한 옛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대원들은 하나같이 품은 숙제가 있다고 했다. 계속 자전거 바퀴를 굴려 언젠가 통일된 땅을 달리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