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행인 1, 2, 3만 했냐? 병사 1, 2, 3, 구경꾼 1, 2, 3…. 진득하게 하다 보면, 언젠간 떡하니 주연도 붙여 주겠지."

무명배우 성근(설경구)은 그렇게 믿고 살았다. 그러나 주인공이 될 기회란 쉽게 오지 않는 법이다. 어디 무대뿐인가. 개발독재와 당장의 생존이 주연이던 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평범한 아버지들은 늘 그림자 속 조연이거나 엑스트라였다. 밖에선 풍파에 닳고 깨어져도 집에서는 의연한 척 가장의 자리를 지켜야 했던, 따뜻한 말 한마디 겸연쩍어 잘 꺼내지 못했던 그 아버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독재자였다.

설경구는 아버지, 예술가, 분단체제의 희생양인 다층적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30일 개봉하는 '나의 독재자'는 70년대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회담 리허설의 김일성 대역을 맡았다가 미쳐 버린 무명 배우 아버지와, 그 아버지 때문에 미치기 직전인 아들 태식(박해일)이 이해와 화해에 이르는 이야기다. 성근은 노모와 아들을 부양하고 생애 첫 주연의 기회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몰입했지만, 유신이 선포되고 회담은 무산된다. 그 충격으로 성근은 자신을 김일성으로 착각하며 20여 년간 각종 사고를 치고, 아들 태식은 빚쟁이 다단계 판매 강사로 자란다. "희망? 행복? ×까라 마이싱! 돈을 목숨처럼 생각해야 돈이 목숨처럼 붙어 있는 거야!" 태식은 아버지의 인감 도장을 받아내 옛집을 팔아 빚을 갚아야 한다. 자신을 '정일이'라고 부르는 아버지를 "위대한 혁명사업을 완성하자"며 구슬려 집에 데려오면서, 부자는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체중 92㎏의 노년의 김일성이 되기 위해 5시간씩 특수분장을 마다하지 않은 설경구의 연기는 명불허전. 돈에 쪼들려 가족도 사랑도 믿지 않는 아들 역의 박해일도 단단한 연기를 보여준다. '귀염둥이 주사파', '허점투성이 연극과 교수', '권위주의의 화신 정보요원' 등 인물 캐릭터도 평면적이지만 강렬하다.

이해준 감독은 성전환 수술을 꿈꾸는 씨름 소년 이야기 '천하장사 마돈나', 외톨이 남녀의 도심 표류 이야기 '김씨 표류기' 등의 작품으로 그만의 색깔을 인정받아 왔다. 평범한 이웃의 삶에 담긴 작은 진실들을 사회성 있는 메시지로 유쾌하게 포장해낼 때 그의 재능은 가장 돋보였다. 이번 영화도 청년들의 고달픈 삶, 사랑 없는 연애, 무너져가는 가족의 의미 같은 현실의 문제를 골고루 무난하게 짚어간다.

매끈하게 잘 정돈된 작품이지만, 묵직한 주제를 나열하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지점들은 아쉽다. 예술가의 자의식,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분단과 시대정신 같은 주제의식 중 한두 가지에만 집중했더라면 좀 더 쫀득한 영화가 됐을 것이다. 상영시간 12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