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 아이고, 정민아~!"

흰 무명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소녀가 엄마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소총을 멘 일본 군인이 소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황금빛 벼는 무르익고, 가을 하늘은 푸르렀다. 슬쩍 바람이 불 때마다 신작로 먼지는 일렁이는데, 붙들려 가는 우리의 딸아이를 누구도 뺏어오지 못했다.

23일 경남 거창군 위천면 서덕들판. 일본군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영화 '귀향(鬼鄕·혼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다는 의미)'의 첫 촬영 현장이다. 조정래(41) 감독은 "정민은 중국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현지에서 숨을 거두고, 무녀(巫女)에 의해 영혼으로 귀향한다. 거창 들녘에서 부모와 정민의 기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장면이 될 것"이라고 했다.

◇'태워지는 처녀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쉼터인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 강일출(86) 할머니는 1943년 일본 순사들에게 붙들려 중국 무단장(牧丹江) 위안소로 끌려갔다. 강 할머니가 2001년 그린 그림이 '태워지는 처녀들'.

23일 오후 경남 거창군 위천면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귀향’의 촬영이 시작됐다. 곧 위안부로 끌려갈 것도 모르고, 아버지(정인기)의 지게에 타고 함께 노래하는 소녀 ‘정민’(강하나)의 모습. 내년 광복절 개봉이 목표인 이 영화는 배우 손숙씨가 주연을 맡고, 재일 교포와 일본 배우들도 참여했다.

강 할머니는 "일본군이 전염병에 걸린 여자들을 불구덩이에 넣어 산 채로 태워 죽일 때 가까스로 살아났다"고 증언한다. 조정래 감독은 2002년 나눔의집 위문공연을 하다 이 그림을 처음 봤다. 이후 '두레소리'(2011) 등 다른 영화를 만들면서도 조 감독의 꿈은 늘 할머니들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10여년간 시나리오 단계였던 영화는 올해 초 배우 손숙(70)씨가 주연을 맡기로 하며 급물살을 탔다. 재일교포와 일본 배우들을 포함, 거의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재능기부 방식으로 참여한다. 일본 언론들도 관심을 보여, 아사히신문과 니혼TV 등이 이달 초 제작보고회와 이번 주 촬영현장을 취재했다.

소녀 정민을 지게에 태우고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을 찍은 아버지 역의 배우 정인기(48)는 "일본은 반성하지 않고, 우리 정부는 미온적이고, 할머니들은 계속 돌아가신다. 어떤 웅변보다 강한 설득력을 가진 영화가 되길 비는 마음"이라고 했다.

정민 역을 맡은 재일교포 4세 강하나(15·일본 오사카)양이 일본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장면.

◇"어중간한 결심으론 못 해"

'정민' 역을 맡은 강하나(15)양은 일본 오사카 재일동포 극단 '달오름' 단장 김민수(40)씨의 딸이다. 김씨는 위안소 관리 일본 여성 '노리코' 역을 맡아 모녀가 함께 출연한다.

일본 우익은 위안부 문제에 극도로 민감하다. 쓰루하시역이나 난바거리 등 오사카 번화가에도 "바퀴벌레 조선인은 떠나라, 관동지진 때처럼 다 죽여버리겠다"는 혐한(嫌韓) 구호가 일상이다. 동포들에게 이번 영화 출연은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양은 "어중간한 결심으로는 못 할 것 같다. 일단 시작한 만큼 두려움은 없다"고 했다.

일본 군인 역의 교포 유신(45·일본 요코하마)씨는 표정 연기만으로 이날 촬영장에서 "와~ 죽이고 싶다"는 열광적 반응을 얻었다. 장교 역 교포 정문성(46·요코하마)씨는 "우리는 한국에선 '반쪽바리'이고, 일본에선 '전쟁고아'"라고 했다.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주변 일본 친구들은 내 설명을 듣고 제작비 기부를 했고 개봉하면 꼭 보러 오겠다고도 했어요. 제대로만 알려줄 수 있다면, 일본인들도 이 아픔을 이해해줄 겁니다."

영화는 올겨울 어린 주연배우들의 심리치료를 겸한 합숙을 거쳐, 내년 상반기 중국에서 집중 촬영한다. 개봉 목표는 광복 70주년인 내년 8·15 광복절이다.

◇"제작비 턱없이 모자라지만…"

제작진은 귀향 홈페이지(www.guihyang.com)를 통해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모금 중이지만, 20억원 정도로 예상되는 제작비에는 아직 턱없이 모자란다. 일본 교포들이 전달한 5000만원, 미주 후원회장인 유영구씨가 애리조나의 한인 상점마다 영화 포스터를 붙이며 모아온 5000달러 등을 포함해 현재까지 모인 제작비는 약 1억2500만원이다.

조 감독은 "외국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수만명이라고 한다. 그분들의 영혼만이라도 조국으로 돌아오시도록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