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좋다고 해서 그림 속 주인공의 삶까지 반드시 좋으라는 법은 없다. 화가 반 다이크의 그림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영국 왕 찰스 1세(1600~1649, 재위 1625~ 1649)의 외모나 삶은 그렇지 않았다.

1603년 헨리 8세의 딸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잉글랜드의 왕위가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가문의 제임스 1세에게 넘어갔다. 이로써 영국 역사 최초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공동 왕이 탄생했다. 종교와 이해가 조금씩 다른 세 나라를 잘 통합해서 이끌어나가야 할 과제가 이 가문에 부과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임스 1세와 그 뒤를 이은 아들 찰스 1세는 열렬한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고, 이 역사적 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안토니 반 다이크, ‘말 조련사와 함께 한 찰스 1세’, 1633.

즉위 후 독단적인 행보를 이어가던 찰스 1세는 결국 의회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재정 적자를 해결하고 프랑스와 전쟁하기 위한 증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소집된 의회에서는 반대로 왕에게 강제 과세 제한과 국민의 각종 자유권 보장을 요구하는 '권리청원'(1628)이 제출된다. 찰스 1세는 이를 묵살하고 국회를 해산해버렸다. 이후 의회는 11년간 열리지 않았다. 반 다이크의 이 그림은 불씨를 겨우 잠재우고 있던 기간에 그려졌다. 왕은 건재하며, 그가 곧 영국의 궁극적인 통치자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찰스 1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통의 부재라고 지적한다. 그는 왕권신수설 신봉자답게 자신의 행동을 일일이 설명하거나 의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화가 반다이크는 그의 이런 단점들을 몽땅 '근접하기 어려운 특별한 존재의 특징'으로 바꾸어 버렸다.

말을 탄 채 위용을 자랑하는 기마상은 본디 군주들을 위한 도상이다. 그보다 낮은 사람들이 말을 타기란 쉽지 않으며, 군주보다 높은 신화적인 영웅, 신들은 그 자체로 위대하므로 말이 필요하지 않다. 그림의 왼쪽 하단에는 커다란 왕관과 스튜어트 가문의 문장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어 그의 가문을 설명하고 있다. 중세 기사의 영광을 재현하듯 찰스 1세는 갑옷을 입고 가터 훈장(영국 최고 권위의 훈장)을 두르고 있다.

그림은 가로 269.9㎝, 세로 368.4㎝ 큰 캔버스에 거의 등신대 크기로 그려져 실제 찰스 1세가 지금, 이곳에 등장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옆에 왕의 투구를 들고 있는 사람은 말 조련사 부르댕이다. 숙련된 말 조련은 기사의 절제와 미덕의 상징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가장 아름다운 생물은 금발의 갈기를 지닌 우아한 백마다. 옛 귀족이나 왕족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혈통 좋은 애완견이나 말들은 함께 등장하는 사람의 좋은 혈통을 암시한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혈통'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적다.

1642년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반란이 청교도혁명으로 이어졌다. 올리버 크롬웰이 주도하는 신기군이 왕당파에 승리를 거두면서 찰스 1세는 결국 1649년 1월 30일 '국민의 적'으로 처형당한다. 처형장에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이제 부패한 나라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나라로 간다. 이 세상의 어지러움이여, 안녕히." 왕권신수설의 절대권력을 주장하던 찰스1세는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생각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왕권신수설은 폐기되었다. 이때 정립된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왕과 의회가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내 영국은 19세기 번영의 토대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