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신주쿠의 명물 ‘LOVE’ 조형물 앞에서 한 여성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등장하는 중년 남자들은 하나같이 아내를 잃고 난 후 기이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백영옥은 도쿄를 ‘소화되지 못한 외로움이 가득 찬 도시’라고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질문과 관련된 것이었다. "류가 좋아, 하루키가 좋아?" 그 시절에는 두 무라카미가 있었다.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 '류'를 좋아하면 조금 근사해 보였고, 하루키를 좋아하면 다소 '신파' 같은 느낌이 있었다. 가령 '하루키를 좋아해'라고 고백하는 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조소 대상이었고, '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취향을 의심받거나 변명해야 하는 일이었다. 1990년대, 무라카미 하루키란 참 기괴한 존재였다. 싫어하는 척하지만 결국 좋아해 버리고 마는 그런 존재랄까.

'1Q84'(일큐팔사)가 나왔을 때, 책에 대한 꽤 많은 글을 썼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는 추천사를 썼다. 그 일은 내게 꽤 당혹스러웠는데, 왜냐하면 하루키의 소설을 재미없게 읽는다는 걸, 나로선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이 재미없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긴 했지만, 나는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내게 적어도 하루키를 부정하는 건 옛날에 사랑했던 여자를 향해 "근데 생각해보니, 나는 너를 사랑한 게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해를 무릅쓰고 비유하자면, 내게는 홍상수의 영화가 제목만 다르지 다 똑같은 것처럼, 하루키의 소설 역시 제목만 다르지 거의 다 똑같다.

나는 황당할 만큼 많은 것이 변하는 시대에 '일관성'은 굉장한 미덕이란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것의 가장 큰 미덕은 기대했던 것을 정확히 채워주는 친밀감이다. 마치 내 몸과 마음의 성감대를 잘 아는 오래된 연인 같은 친근함 말이다. 길 떠나고 싶을 때 읽는 윤대녕의 소설처럼, 엄마가 생각날 때 읽는 김애란의 단편처럼 나는 비행기를 타거나 긴 여행을 떠날 때 하루키를 읽는다. 그리고 원하는 딱 그만큼의 위로를 얻는다. 원하는 '그 맛'을 늘 느끼게 해주는 좋아하는 단골 가게처럼.

'여자 없는 남자들'은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다. 비행기 안에서 잠을 자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거의 못 하는데, 하루키의 책이라면 얼마간 읽을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중년 남자는 전부 연인이나 아내를 외도나 병으로 잃었다. 다양한 여자를 만나던 독신 의사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 끝에 거식증에 걸리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도쿄는 짐승의 고장 난 위장처럼 끝내 소화되지 못한 외로움이 가득 찬 도시다.

먹지 않는 것으로 자기 몸을 비워내던 남자는 "모든 여자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 기관을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독백하듯 고백한다. "어떤 거짓말을 언제 어떻게 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모든 여자는 어느 시점에 반드시, 그것도 중요한 일로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도 물론 거짓말을 하지만 그건 제쳐두고, 아무튼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때 대부분의 여자는 얼굴빛 하나, 목소리 하나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 몸의 독립 기관이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최후 변론이자 진술인 셈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는 하나같이 중년이고, 그들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는 하나같이 기이하다. 몸 여기저기에 담배 빵이 있거나, 지치지 않을 정도로 신비로운 이야기를 해대는 여자도 있고, 발기하는 것조차 추잡하게 느끼게 만들 만큼 순수한 소녀도 있다. 책을 전부 다 읽은 후, 나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한 번 더 읽었다. 유명 배우를 아내로 맞은 무명 배우가 아내의 죽음 이후, 아내의 '다른 남자'(그는 잘생긴 중년 배우다)를 만나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을 읽다가, 묘한 데자뷔를 느꼈다.

"어떤 경우에도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 사고이자 삶의 방식이었다. 설령 아무리 극심한 고통이 닥친다 해도 그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강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상상보다 더 괴로운 것은, 아내가 품고 있는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안다는 걸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후쿠는 프로 배우였다.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 타인을 연기하는 것이 그의 생업이다. 그리고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연기했다. 관객이 없는 연기를."

나는 불륜을 '저지른 사람'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불륜을 모른 척 '감당해야 하는 남자'의 내면에 훨씬 더 마음이 갔다. 배우인 그는 자신의 직업을 극명한 슬픔을 감추는 데 몽땅 써버리고 나서, 어쩐 일인지 배우 경력에 날개를 단다. 성격파 배우쯤으로 규정할 수 있는 패턴 연기를 가장 훌륭하게 표현하는 배우가 된 셈이다. 이때, 남자가 술을 마시는 도쿄의 바에는 싱글 몰트위스키가 슬픔처럼 흐르고, (결과적으로) 한 여자에게 배신당한 두 남자가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대화 역시 기묘하게 흐른다.

"내가 아닌 것이 되는 게 좋아요?

다시 원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안다면.

원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적은 없어요?

가후쿠는 잠시 생각했다. 그런 질문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나이가 들어 작품이 단순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복잡다단한 삶을 설명하기 위해 말이 조금 더 정교하게 복잡해지는 사람도 있다. 슬픔을 슬픔 이외의 것으로 표현하거나, 공허를 공허 이외의 말로 발설하는 데에 꽤 많은 낯선 풍경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그때의 말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그 말의 거죽과 속을 뒤집거나, 가장 먼 거리에 떨어진 말들을 불러들여 의미를 한층 증폭시킨다. 이때, 소설을 읽는다는 건 절망으로 희망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익히거나, 이별을 감당하면서 시작되는 게 사랑이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는 방법이 된다.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다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하루키가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헤어진 옛 연인의 낡은 뺨을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 첫 번째 단편을 읽고 난 후, 나는 책장을 덮고 '상실의 공동체'에 살고 있는 몇몇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만년이 청춘일 것 같던 하루키도 칠순을 바라보며 조금씩 늙고 있었다. 내 청춘의 작가와 함께 낡아가고 있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여자 없는 남자들―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소설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