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엔 없는 시장입니다. 나라 밖, 세계에도 없는 시장이더라고요."

지난 15일 서울 장충동 '타작마당'에 이채로운 장터가 열렸다. '안 팔리는 책시장'. 출판 불황 탓에 1쇄로 펴낸 2000부도 다 못 팔고 수명을 마치는 책들이 넘쳐나는 요즘, 출간된 지 얼마 안 돼 초야에 묻힌 '좋은 책'들을 되살려보기 위해 아트센터 나비가 기획한 이벤트다.

아이디어를 낸 이는 이 센터의 기획매니저 최윤정씨로,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맏딸이다. "어머니(노소영)가 최근 '디지털 아트'란 책을 냈는데 출판기념회 안 하느냐 물었더니 '어차피 안 팔린 건데 뭐하러?' 하더라고요. 그때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의미 있는 책인데 팔리지 않는 책들을 위한 시장은 어떨까 하는."

서울대 박태현 교수(왼쪽)가 자신의 책을 열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많아야 10명 정도 신청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30명 가까운 저자가 손을 들었다. 유명 대학 교수부터 사진작가, 경영컨설턴트, 법조인, 인문학자까지 다양했다. 행사 현장에서 신청한 저자들까지 합치면 50명이 넘는다.

시장 운영 방식이 독특했다. 참가자들은 가져온 책의 권수만큼 티켓을 받는다. 그 티켓으로 시장에 나온 다른 저자의 책을 1장당 1권 구입할 수 있다. 저자에겐 1분간의 홍보 시간이 주어졌다. 스피치가 끝나면 책을 사고 싶은 사람이 티켓을 높이 들어 구매 의사를 밝힌다. 저자가 팔러 나온 책의 권수와 구매자 수가 일치하면 문제가 없지만, 구매자 수가 더 많으면 책값이 배로 뛰기 시작한다. 일종의 경매 방식이다. 반대로 구매자가 적으면 중고시장으로 직행한다.

이날 제일 먼저 나선 이는 '지금 당장 경영학 공부하라'의 저자인 글로벌 경영컨설턴트 김태경씨. 그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경영학 입문서"라며 자랑했다. 박태현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장은 '처음 읽는 미래과학교과서' 등 자신이 쓴 과학 교양서를 들고 나왔다. "중고생 자녀를 둔 부모님이 관심 가질 만한 책"이라며 목청을 높인 박 교수는 "내가 이렇게 책 장사까지 할 줄은 몰랐다"해 폭소가 터졌다. 박정세 연세대 신학대학원 교수는 '민담과 민속의 신학적 이해' 등 8권을 선보여 '완판'을 기록했고, 사진작가 김영호씨는 자신의 사진에세이를 서평한 글을 낭독해 역시 완판됐다. 노소영 관장도 '디지털 아트'를 들고 참여했다. "누가 읽으면 좋을 책이냐"는 질문이 나오자 "아, 그게 문제"라며 머리를 긁적여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지용민 예술경영팀장은 "책 판매가 목적은 아니었다. 우리가 몰랐던 좋은 책과 저자들을 만나 진솔하고 유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했다. 이날 시장에 나온 책은 200여권. 중고 시장으로 밀려나온 책들까지 2시간 만에 모두 판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