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드라마는 역사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방송 전 친절하게 자막으로 설명해 준다. 그러니 ‘역사 왜곡’ 운운할 마음은 없다. 이건 그냥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요즘 드라마’일 뿐이다. 말투도 현대 서울말이요, 태도나 옷맵시 역시 마찬가지다. 극적 효과를 위해 가공 인물인 영의정 김택(김창완)이 영조(한석규) 임금에게 반말지거리를 하기도 하고, 후궁이 왕세자빈 앞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여기서 위아래를 찾으면 곤란하다. 방송 제작진이 늘 강조하듯 “어디까지나 드라마일 뿐”이니까. 그래도 명색이 사극인지라, 역사를 모르면 이해가 어렵다. 대본은 흥미로운 야사(野史)를 사실상 창작했는데, 소론을 등에 업은 경종이 왕좌에 앉자 노론이 영조를 포섭해 경종을 독살했다는 얘기다. 노론에게 멱살을 잡혀 목숨 부지조차 불안해진 영조는 향후 노론의 꼭두각시가 될 걸 각오하고 그 위험한 모의에 참여한다.

사극 ‘비밀의 문’에서 영조 역을 맡은 한석규(왼쪽)와 사도세자 역의 이제훈.

사건의 핵심추는 대일통맹의(大一統猛毅), 줄여 '맹의'라 불리는 종이 문서다(물론 가공이다). 영조가 경종의 독살 모의에 서명한 맹서로 보이는데 "제발 내 인생에서 꺼져버려"라는 영조의 절규처럼, 지독한 덫이다. 맹의는 사도세자가 절대 봐선 안 될 '비밀의 문'으로 설정된다. TV 화면에 비친 맹의엔, 현대 한자어를 조악하게 짜기워 '구국의 유일한 방책은 충렬한 선비들이 궐기해 새 군주를 택하는 것'이라 적어 놨다. 이 구도에선 영조와 노론, 당쟁의 파트너 소론 모두 악(惡)이다.

순수하게 선한 자는 주인공 사도세자뿐이다. 그간 사극에서 숱하게 비쳤던 '미치광이' '찌질이'가 아닌 '정의의 사도'다. 게다가 '건축학개론'의 주인공 이제훈(!)이다. 맹의 때문에 살해당한 절친한 화공(�工)의 원한을 풀기 위해 정치적 암투의 한복판에서 의리 하나로 고군분투하는, 일찍이 있어본 적 없는 사도세자라 신선하지만 스펙터클은 없다. "백성은 하늘이다, 전 이 말이 좋습니다" 같은 낯 간지러운 대사를 읊는 '청소년 백성' 김유정과의 로맨스는 제쳐놓자. 모두 정치를 얘기하는데 혼자서만 정의를 부르짖으니 맥이 풀린다. 그런데 정조 때 편찬한 '영조실록'에 "세자가 10여세 이후 학문에 태만했고, (정신)병이 생겨 궁녀와 내시를 죽이고 후회했으며, 기녀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했다"고 기록된 건 가볍게 무시해도 되는걸까? 그렇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니까.

픽션에서 현실이 읽히는 건, 두 가지 경우다. 속 깊은 은유로 뇌리에 공명(共鳴)을 일으키거나, 아니면 딱딱 아귀가 들어맞는 정확한 대칭을 보여주는 경우. 이 드라마는 후자에 가깝다. 살인사건 진상 규명을 위해 중도 인사를 등용한 ‘특검’을 설치하는 설정, “불리하면 역도(逆徒)부터 만드는 버릇, 노론이 은폐하고자 하는 진실이 뭡니까?” 처럼 오늘날 현실 정치를 노골적으로 지시하는 대사는 촌스럽기까지 하다. 6회에서 기생으로 분장한 김유정의 가체에 묶인 노란 끈은 최근의'어떤 사건'에 대한 연상 작용을 노린 게 아닌가 싶다. 만일 그렇다면 직설적으로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제발 유치한 연출은 피해 주세요.” 그런 디테일에 신경 쓸 여력은 드라마 품질 높이는 데 써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