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문단이 '산문(散文) 시대'를 맞고 있다. 소설가 최인호 1주기(9월 25일)를 맞아 그가 생전에 딸과 손녀를 위해 쓴 글을 모은 산문집 '나의 딸의 딸'(여백 미디어)이 나왔다. 시인 이성복은 산문집 '고백의 형식들'(열화당)을 펴냈고, 소설가 김영하도 산문집 '보다'(문학동네)를 내놓았다. 창작에선 희미했던 영혼의 자화상(自畵像)이 명징하게 드러난 산문집들이다.

1주기를 맞은 소설가 최인호의 산문집 ‘나의 딸의 딸’에 화가인 장녀 최다혜가 그린 삽화가 들어갔다.

최인호는 첫딸을 얻자 결혼식 주례를 선 작가 황순원을 찾아가 작명을 부탁했다. 황순원은 자신의 소설 '일월'에 나오는 이름 '다혜(多惠)'를 선사했다. 최인호는 생전에 '딸바보'로 지내며 딸의 성장기를 꼼꼼하게 적어뒀다. "아아, 그렇다. 우리 다혜가 이제 봄나무가 되었다. 사춘기의 광기 어린 꽃봉오리가 툭툭 소리를 내면서 벌어지고 있다." 그는 딸이 성년을 맞자 겸손해졌다. "나는 다만 아버지로서 그녀가 우리의 곁을 떠날 때까지 잠시 맡아 기르는 전당포 주인에 불과한 것." 그는 딸이 손녀를 낳자 환호작약했다. "지금까지 인생의 풀밭에서 내가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하였던 하느님이 주신 보물쪽지 중에 그 으뜸이다." 그는 암 투병 중 손녀 사랑이 담긴 글을 써내려갔다. '나의 딸의 딸'이란 책 제목도 정해놓고 쓴 그 글들이 이번에 묶였다. 손녀를 향한 그리움이 '첫사랑의 열병보다 혹독'하다고 했다. 손녀를 다시 만난 기쁨은 '부활한 예수를 본 제자들의 어쩔 줄 모르는 기쁨' 같다고 했다. 작가는 아버지에서 할아버지로 거듭난 남자의 참을 수 없는 환희를 명랑하고 유쾌하게 그려냈다.

(사진 왼쪽부터)최인호, 이성복, 김영하.

이성복 시인의 산문집은 시와 삶이 맺는 사랑을 담고 있다. "시를 통해 사람은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시를 쓰면서 '돌과 누이'처럼 평소 단절된 단어들을 접붙이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것은 보다 자유로운 삶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시란 기화성(氣化性) 식물과 같은 것'이다. 붙잡으려면 안 보이기 때문이다. 시는 '추억과 희망의 점화(點火)'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일상에 가리어진 그 청정한 빛!'이다. 그러나 '진짜 시인'은 "왜 나는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가"라고 탄식하기 마련이다. 이성복은 글이란 '아무 생각 없이 말이 엮이는 과정'이라고 본다. 마치 상가(喪家)에 온 문상객들이 옆자리 사람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듯이, 글은 개인의 여러 체험들이 얽히는 것이라고 비유한다. 그렇다면 '글 쓰는 사람은 상주(喪主)일까, 고인(故人)일까'라는 게 시인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김영하는 21세기 세태를 경쾌하게 풍자한다. 그는 스마트폰을 '시간 도둑'이라 부른다. 부자와 빈자 모두 스마트폰에 중독됐지만 빈자가 더 많은 시간을 뺏긴다. 빈자일수록 하릴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낭비한다. 부자는 그 시간에 스마트폰 제조사의 주식을 산다. 빈자가 스마트폰에 시간을 많이 뺏길수록 부자의 주가(株價)가 크게 오른다. 소득 불평등 시대는 '시간 양극화'도 낳는다. 김영하는 "이런 세계에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고 묻는다.

김영하는 우리 사회에서 강자의 '자유'와 약자의 '선택'도 불평등하다고 본다. 강자는 '빼앗을 자유'를 누리지만 약자는 '뺏길 선택'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라틴어 격언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와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의 유행에 담긴 뜻도 짚었다. 현대는 '위험사회'다. 죽음을 늘 의식하는 만큼 현세의 쾌락이 더 달콤해진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결국 동전의 앞뒤처럼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