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전방 초소에서 집단 살상(殺傷) 사고가 나더니 집단 구타로 병사가 죽어나갔다. 최전방 사령관은 대통령 해외 순방 중에 근무지를 떠나 크게 취했다. 검찰의 섹스 스캔들은 그들의 야릇한 취향을 반영한 듯 무척 다채롭다. 검찰총장부터 말단 검사까지 검찰 조사실에서, 별장이나 애인 집에서 그리고 큰길가에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에 빠져 원초적 본능을 즐긴다. 작년 한 해 국가정보원의 정치 댓글 사건으로 온 나라가 진저리를 쳤다.

왜 이런 일이 그치지 않는가. 누구는 군기(軍紀)가 풀렸다고 하고, 다른 누구는 어디나 유별나게 튀는 별종(別種)이 있다고 변호하기도 한다. 허망한 것은 '전에는 다 덮었던 사건들인데…'라는 분석이다.

그러고 보니 군사독재 시절 웬만한 군부대 내 사고는 보도 금지에 묶였다. 공산당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명분, 전방에서 갖은 고생 다한다는 하소연을 버무려 좀체 공개하지 않았다. 검찰과 정보기관의 위법 행위도 불순 세력을 색출하는 막중한 일을 보고 있다는 '공안(公安) 포장지'에 덮여 감춰지기 일쑤였다.

군 출신 대통령이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동안 장성(將星)들은 국회의원, 공기업 사장, 장관으로 중용됐다. 검찰 출신들도 정보기관, 국회, 행정부의 중심 영역을 점거했다. 육사를 졸업한 군 엘리트와 서울 법대를 나온 법조인이 권력을 장악했다고 해서 '육법회(陸法會)'라는 단어도 탄생했다.

그 시절 우리는 공산당과 싸워야 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민주화운동, 노동운동도 억압했다. 군, 검찰, 경찰, 정보기관은 권력자의 애정이 듬뿍 담긴 통치 도구였다. 그들의 실수·실책은 땅 밑에 덮이곤 했다. 그래서 그럴까. 지금도 군 지휘관, 검사, 정보기관 사람들 가운데는 세상이 바뀐 줄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직 박정희 시대의 연장전이 계속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이 물려받은 아버지의 유산(遺産) 중에는 골칫덩어리가 적지 않다. 관료 집단도 그렇다. 박정희는 경제성장 전략의 주도 세력 형성, 정책 결정과 집행의 신속성 등을 위해 최고 인재를 공무원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을 외국에서 공부시킨 뒤 민생 현장에 내보내 성과를 내도록 독려했다. 관료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높아졌다. 일만 터지면 정부와 공무원에게 해결책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시민 스스로가 해야 할 소비자보호운동마저 관청이 하는 나라, 시민단체 활동도 정부 보조금으로 이어가는 나라가 됐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는 공무원 조직의 속살을 보았다. 그 속살은 흉한 상처만 있는 게 아니라 에볼라 바이러스처럼 국민을 살상할 수 있는 치명적인 세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제 관료 집단은 문제를 해결하는 종착역이 아니라 온갖 문제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목격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하나둘 박근혜 대통령을 배신하고 있다.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민족자본을 형성하겠다고, 그렇게 해서 가난한 나라를 중흥(中興)시켜보겠다고 콩나물 기르듯 속성으로 키운 기업들도 등을 돌리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내놓은 국가 경쟁력 순위를 보면 작년에 6단계 떨어지더니 올해 1등급 더 낮아졌다. 세계 26위다. 노무현 정권 말기 2007년 11위에서 급추락했다. 국가 경쟁력 조사는 주로 기업인을 상대로 하는 여론조사를 기반으로 순위를 매긴다. 우리 기업인들은 좌파 정권보다 이명박·박근혜의 대한민국에 더 야박한 점수를 준 것이다. 기대치가 높았다가 실망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선거 때마다 도와줬더니 돌아온 것은 세무조사와 경제 민주화 철퇴였다는 섭섭함 때문인가.

어디로 가야 할지 해답은 뻔하다. 관료·군·검찰·경찰·정보기관이 먼저 수술대에 올라야 할 중환자라는 사실은 드러났다. 얼마나 더 흉측하고 해괴한 스캔들이 터지고,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과거 군사정권을 지탱해주던 통치 기구들이 재건축 대상 아파트라는 것을 깨달을 것인가. 헐어낼 곳은 헐어낸 뒤 다시 짓고, 잘라낼 곳은 잘라내되 꿰맬 곳은 꿰매야 한다.

국민은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하라고 다수당을 만들어 줬다.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말라고 선거 때마다 승패(勝敗) 판정도 분명하게 내려줬다. 그런데도 집권 세력은 '선진화' 문패를 단 감옥에 스스로 갇혔다. 그러면서 대통령, 총리, 부총리가 매번 민생 법안을 들고 나와 국회를 탓하고 야당을 원망한다.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감방에서 제 발로 나오기가 쑥스럽다는 것인가. '식물 국회'는 아버지의 유산도 아니어서 조상 탓을 할 수도 없다.

아버지가 가꿔놓은 정원에 많은 인재들이 축적됐다. 몇백만 달러가 없어 공장을 못 짓던 시대는 가고 투자 여력이 넘치는 나라로 바뀌었다. 주변 국가들의 평판(評判)도 높아졌다. 박 대통령과 집권당의 눈에는 이런 좋은 유산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개각(改閣), 대북(對北) 정책, 국민과 소통 방식 등을 보면 우량한 유산들의 힘이 극대화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그러니 썩을 대로 썩은 유산들만 거리를 활보하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