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44)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재활지원센터장을 만난 28일, 그는 "절묘하게 맞춰 왔다"고 했다. 그날은 그가 장애인이 된 지 28년이 되는 날이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20여일 앞둔 김소영은 이단평행봉을 연습하다가 추락해 입 주위 근육만 겨우 움직이는 처지가 됐다. 키 137㎝, 몸무게 30㎏에 불과한 열여섯 살 소녀의 꿈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2년 6개월의 병원 생활과 10여년의 재활훈련이 이어졌다.

"장애보다 더 괴로운 건 체조를 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었어요. 사고 후 2~3년은 꿈을 버리지 못해 병원에서 외출하면 체조 연습장이나 경기장을 배회했어요. 체조 선생님이 '네가 오면 다른 선수들이 불편할지 모른다'고 말해 종일 울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 비로소 '나는 더 이상 체조를 할 수 없는 몸이구나'라고 받아들였던 거 같아요."

“체조는 죽어서 천국 가서 하면 되지요.” 체조를 잊었다는 게 과연 진심일까. 김소영의 휴대폰 벨소리는 몇 년째 같다. 런던올림픽 테마곡이던 영화 ‘불의 전차’ OST, ‘Titles’이다.

다행히 김소영은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신께서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놓으셨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 이유를 찾기로 했죠. 그게 체조는 아닌 것 같고, 어려움을 겪는 동료 장애인들을 돕는 거라고 믿게 됐어요. 선천적 장애인에 비하면 제가 16년이나 건강한 몸으로 살았잖아요. 게다가 조금 유명해서 응원과 사랑도 받았고요."

그는 25세 되던 1995년 장애인 스키캠프를 열었다. 기업 후원부터 특수장비 마련까지 직접 나섰다. "스키 타는 것 자체가 저희에겐 큰 용기잖아요. 한 분은 장애인이 된 후 10년간 집에만 있다가 처음 눈밭을 보셨대요. 그분은 캠프에서 자신감을 얻었고, 지금은 직장까지 잡았죠. 저도 바람을 가르며 눈 위로 미끄러지면서 사고 후 처음으로 자유로움을 느꼈어요."

1986년 기계체조 국가대표 시절의 김소영(앞줄 가운데)선수와 동료들.

그렇게 스키 캠프를 거쳐 간 장애인이 200명 정도 된다. 이후로도 김소영은 장애인 스킨스쿠버 동호회를 만드는 등 장애인 체육에 매달렸다. 1991년부터는 '사랑의 휠체어 보내기' 캠페인에도 나서 지금까지 1000대 넘게 전달됐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때는 휠체어를 타고 성화 봉송 주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김씨는 작년 초부터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재활지원센터장을 맡고 있다. "갑자기 장애인이 되면 앞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해요. 그들을 위해 정보를 전하는 거죠. 선배 척수(脊髓)장애인들이 병원에 가서 장애인의 실제 삶이 어떤지 보여주는 거예요. 지금 전국에서 20명이 활동하고 있어요." 그는 지난 4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김소영이 출전하지 못한 86 서울아시안게임에서 한국 팀은 금메달 2개를 획득했다. 한국 여자 기계체조의 정점이었다. "그땐 목도 못 돌려서 거울로 두 번 반사시켜서 TV를 봤어요. 태릉에서 함께 먹고 자며 운동한 동료들을 진심으로 응원했어요. 눈물이 귀로 들어가는데 못 닦으니 간지러웠어요." 그는 최근에도 태릉을 찾아가 이번 인천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후배들을 응원하고 왔다.

김씨는 "나이 사십이 넘으니 체조에 대한 미련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했다. 재작년 런던올림픽 때는 체조 중계가 재미없어서 처음으로 채널을 돌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