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의 연해주(沿海州)에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거쳐 에스토니아로 이어진 유라시아 길은 우리 가족사(史)에선 '아픔의 길'입니다. 하지만 원코리아 뉴라시아 평화 원정대가 이 길을 거꾸로 거슬러 가면서 '평화와 희망의 길'로 바꿔주길 바랍니다."

8월 31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Tallinn)의 올드타운(옛 시가지)에 있는 시(市)청사. 미하일 클바르트(Kolvart·37) 부시장(문화·체육·복지 담당)은 원정대원들을 초청해 환담을 나누며 이렇게 말했다.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던 고려인 3세인 그는 자신의 뿌리가 시작된 한국에서 에스토니아까지 찾아온 원정대에 큰 관심을 보였다.

연해주에 터전을 잡고 있던 그의 외조부모는 1937년 어느 날 갑작스럽게 카자흐스탄 남부 키질오르다 지역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태어난 클바르트 부시장의 어머니 리디야 고(72)가 카자흐스탄에 연수 와 있던 에스토니아인 변호사 윌로 클바르트와 결혼하면서 이 가족들은 1980년 에스토니아로 이주했다. 에스토니아로 갔을 당시 클바르트 부시장은 세 살이었다. 그는 "난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 어머니, 에스토니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썼다"며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은 한국과 유라시아가 겪어야 했던 아픔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구 상에서 최후진국 중 하나였고, 36년간 나라마저 잃었던 반쪽 조국은 그의 성장 과정에서도 큰 아픔이었다.

어린 시절 혼란을 겪던 그를 다잡아준 것이 태권도였다. 열두 살 때 어머니 권유로 태권도를 시작했고, 아버지는 그를 위해 카자흐스탄에서 직접 사범을 초청했다. 이는 곧 '에스토니아 태권도'의 시작이기도 하다. 클바르트 가족에 의해 에스토니아에 도입된 태권도는 현재 10개의 도장이 생길 만큼 인기를 얻고 있다. 클바르트 가족은 1992년 에스토니아 태권도협회를 설립했고, 클바르트 부시장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협회장을 맡았다. 현재 공인 5단인 그는 2001년부터는 '발트컵'이라는 국제 태권도 대회도 열고 있다. 태권도와 관련한 그의 활동은 그가 2011년 탈린시 부시장에 선출되는 데 발판이 됐다.

"고려인의 핏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어머니 영향 때문일 겁니다." 모스크바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인텔리 여성이던 리디야 고는 에스토니아 이주 후 카자흐스탄에 남아있던 동료 고려인을 100명 넘게 에스토니아로 초청했다. 현재 발트3국 중 에스토니아에만 고려인 200여명이 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 리디야 고는 에스토니아 고려인 이주의 역사 그 자체다. 소수민족자치협의회장을 맡으며 고려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권리 향상을 위해 애썼고, 고려인 무용단을 양성해 한국 문화 알리기에도 힘썼다. 클바르트 부시장은 "어머니는 밥상에 매일 김치를 내놓으며 핏줄에 대해 가르쳤다"고 했다.

에스토니아의 고려인 3세이자 탈린시 부시장인 미하일 클바르트(왼쪽 끝)가 지난 31일(현지 시각)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 원정대로부터 원정 경로를 그려넣은 스카프를 받고 있다. 그 오른쪽은 차례대로 안영민, 이상구, 황인범, 최병화 대원.

클바르트 부시장은 최근 몇 년 새 한국과 북한을 모두 방문했다. 2012년에는 한국 외교부가 주관하는 '유럽 차세대 지도자' 프로그램 중 하나로 서울을 방문했고, 2009년에는 평양에서 열린 국제무술협회 포럼에 참석했다. 그는 "그때 본 남·북한의 모습은 너무나 차이가 났다"며 "한때 같은 나라였던 두 곳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정이 아주 복잡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려인의 뿌리는 '남한'도 '북한'도 아닌 '한국'"이라며 "이번 원정대의 도전이 평화 통일의 꿈을 이루는 발판이 될 수 있도록 어머니를 비롯해 모든 에스토니아의 고려인들과 응원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