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중견기업에 다니는 최모(여·28)씨는 "지금도 가끔 빚 갚는 꿈을 꾼다"고 했다. 명문 사립대를 나온 최씨는 대학 시절 6년을 월세 15만원짜리 방에서 보냈다. 키 165㎝인 그의 발끝이 벽에 닿는 창문 없는 쪽방이었다. 그는 "거지처럼 살면서 내내 과외를 3~4개씩 뛰었다"고 했다.

하지만 등록금은커녕 생활비 대기도 버거웠다. 남들 다 하는 면접을 위한 스피치 학원, 토익·토플 학원 등을 빼먹으면 뒤처질 것 같아 월 100만원씩 썼다. 여기에 전공 책값과 월세를 내고 나면 편의점 삼각김밥 아니면 2000원짜리 학생 식당 메뉴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학기마다 받았던 학자금 대출은 졸업을 앞두고 10건이 됐다. 대출 건마다 이자 갚는 날이 달랐다. 최씨는 "하나라도 빼먹어 신용 불량자가 될까 봐 아등바등했다"고 말했다. 매월 열 번째 이자를 내고 나면 진이 빠졌다고 했다.

최씨는 전형적인 '스튜던트 푸어(student poor)'였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양정승 박사는 "스튜던트 푸어는 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취업 준비 비용, 학자금 등의 지출이 늘어나 빈곤의 늪에 빠진 세대를 말한다"며 "취업에 실패할 경우 '푸어'의 악순환은 계속된다"고 말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대학·대학원생, 고시학원·직업훈련기관 수강생, 취업 준비생 신분인 20대 316만여명 중 1인 가구 기준 월수입이 106만7731원 미만인 학생 34만여명(11%)이 빈곤 가구, 즉 스튜던트 푸어다. '빈곤 가구'는 인구를 소득에 따라 한 줄로 세웠을 때 딱 중간인 가구의 수익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돈을 버는 가구들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스튜던트 푸어는 졸업 후 어렵게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당분간은 빈곤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최씨는 6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자마자 학자금 대출 3000만원의 원리금 상환을 시작했다. 월급의 4분의 1이 꼬박꼬박 빠져나갔다. 쪽방에서 벗어나 월세 40만원짜리 방으로 옮기는 데 만족했다. 입사 만 3년째였던 작년 10월 마지막 원리금을 갚은 최씨에게 회사 선후배들은 "열심히 살았다"며 조촐한 축하 파티를 열어줬다. '드디어 고생 끝!'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어머니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잊고 있었던 다른 학자금 대출 360만원을 상환하지 않아 신용 불량자가 될 위기라는 것이다. 은행으로 내달렸다. "여기 돈 갖고 왔어요! 저 신용 불량자 안 되는 거죠?" 대출금을 갚고 나오던 최씨는 다리가 풀려 은행 앞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드디어 빚을 다 갚았다는 기쁨과 그동안의 괴로움이 버무려진 눈물이었다.

가난한 대학생과 취업 준비생들은 과거에도 있었다. 고학생(苦學生)이라 불리는 그들은 취업만 하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스튜던트 푸어는 취업 가능성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취업 포털 인크루트에 따르면 4년제 대학에 적을 둔 학생 수는 2005년 185만9000명에서 2012년 210만3000명으로 24만4000명이 늘어났으나 같은 기간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들의 신입 사원 채용 규모는 겨우 9000명만 늘었다.

올해 26세가 됐지만 아직 수도권 한 사립대 3학년생인 양모씨의 한 달 생활비는 15만원, 하루 5000원꼴이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저녁은 학교식당 1700원짜리 메뉴로 해결한다. 밤늦게 공부해 졸린 날엔 1000원짜리 커피에 500원 하는 우유를 타 마시는 걸로 점심을 대신한다. 술값이 부담스러워 술자리엔 안 간다. 영화는 헌혈하면 주는 영화 예매권으로 가끔 본다. 한 살 많은 형(대학생)과 월세 40만원에 26㎡(약 8평)짜리 방을 얻어 사는 그의 가장 큰 사치는 한 달에 한 번 둘이서 치킨을 시켜 먹는 것이다. 양씨는 1·2학년 땐 술집과 옷 가게, 도로 공사장에서 일했다. 3학년이 되면서 아르바이트를 접었다. 스펙을 쌓으려 한 정부기관의 홍보단 활동을 하면서 돈 벌 시간이 줄었다. 학점이 떨어져 재수강 과목이 자꾸 생기는 것도 부담이었다. 취업을 위한 영어 공부 시간도 필요했다. 눈 딱 감고 부모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골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 두 분이 매월 부쳐주는 80만~100만원으로 형과 월세와 학비를 나눠 쓴다. 대신 먹고 쓰는 걸 최소화했다. 양씨는 "부모님이 주신 돈만으로는 사회가 원하는 것을 준비하기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어쩔 수 없이 빈곤을 택했다"고 말했다. 등록금은 1학년 때부터 학자금 대출을 받아 해결했다. 2250만원이나 된다.

스튜던트 푸어가 늘어나는 데는 취업에 필요한 각종 자격증, 영어 점수 등 스펙(SPEC·특정 장비의 기능을 뜻하는 specification의 준말)을 쌓기 위해 드는 비용이 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점도 한몫하고 있다. 2012년 청년유니온 통계에 따르면 대학생들은 재학 기간 동안 생활비를 제외하고 대학 등록금을 포함한 스펙 비용으로만 평균 4269만원을 쓴다.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 문을 뚫기 위해 스튜던트 푸어로 살다가 취업을 포기하거나 고리 채무자로 전락하는 사례도 적잖다.

수도권의 한 대학 사회복지학과를 나와 중소기업에 취직한 신모(29)씨는 월급 대부분을 빚 갚는 데 쓰고 있다. 그는 대학 마지막 학기에 공무원 시험 학원비 80만원과 교재비 20만원을 합쳐 100만원을 빌렸었다. 빚을 내더라도 빨리 합격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업이 없는 신씨가 기댈 곳은 대부업체. 금리는 연 36%였다. 3년 내리 취업에 실패하면서 대출금이 늘었다. 원금 100만원이 3000만원이 됐다. 신씨는 결국 복지 공무원 꿈을 접고 지금의 직장에 취직했지만 아직도 남은 빚이 1200만원이다. 그는 "언제쯤 월급을 온전히 쥐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퇴근 후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빚을 갚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연이자 20% 이상 고금리 대출을 쓴 대학생은 약 8만8000명이다.

전문가들은 '취업을 위한 지출 증가→비용 마련을 위한 저임금 노동과 빈곤한 생활→취업 실패→취업 준비의 장기화→저임금 노동과 빈곤한 생활 고착화'라는 악순환에 청년들이 빠져들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전북대 사회학과 이상록 교수는 "대졸자를 포함한 20대 중 상당수는 배울 만큼 배웠고 실제 사회에 내놔도 손색없는 상황인데 사회로 진출하는 입구가 좁아져 너무 오래 대기하고 있다"며 "이는 국가 전체에도 큰 손해"라고 말했다.

☞스튜던트 푸어(student poor)

사회 진출을 준비하는 ‘학생’ 가운데 빈곤한 사람들을 뜻한다. 대학을 졸업했어도 취업 준비생·고시생·수험생으로 남아 있어 ‘사실상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 중 빈곤선 아래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국내 스튜던트 푸어는 34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