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미국의 핵 물리학자 리원허(李文和)가 FBI에 체포된 것은 1999년 12월이었다. 그는 중국에 핵무기 정보를 몰래 제공한 혐의를 비롯, 59개 죄목으로 기소됐다. 가족 이외의 면회는 금지됐다. 독방에 갇힌 것이다. 그러나 다음 해 9개월 만에 풀려났다. 자료 관리를 잘못했다는 것 외에는 무죄가 선고됐다. FBI의 잘못된 수사에 빌 클린턴 대통령까지 나서서 공개 사과를 했다.

리원허 사건 판결에서 판사는 인상적인 발언을 했다. "보석(保釋)을 허가하지 않고 독방에 감금한 것을 미국 정부(Government)가 사과한다"는 취지였다. 법원이 행정부를 대신해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와 행정부가 한 몸이라는 입장에서 사과한 것이다. FBI의 수사 실패를 왜 판사가 사과하느냐고 한국인들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교과서에선 행정부는 '좁은 의미의 정부'라고 가르친다. 넓은 의미의 정부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모두 포괄한 국가 운영 조직체를 뜻한다. 그 판사는 똑같이 국가의 일을 하는 입장에서 행정부가 무고하게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씌운 시민에게 사죄한 셈이다.

우리에게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독립 부서로 서로 견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세 조직체가 다 같이 국가라는 틀 안에서 국민이 위임한 업무를 분담(分擔)해 대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일쑤다.

세월호 유족들의 행동에서도 그런 혼돈의 조각들이 튀는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유족 대표들은 당초 정부·여당을 배척하고 야당에 의탁했다. 그러더니 여야 합의를 두 번 걷어찼다. 지금 국회 의석을 볼 때 여야 합의란 사실상 입법부가 결정했다는 뜻이다. 입법부의 결정은 대통령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나랏일을 분담하면서 옆 부서가 결정한 것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족들은 야당을 배척하고, 입법부의 뜻을 부정했으며, 크게 보면 '넓은 의미의 정부'도 불신임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나왔다. 국가원수(元首)로서 대통령이 결단을 내리라고 촉구하고 있다. 대통령이 국가원수인 것은 외교나 안보상 긴급 현안을 결정할 때 나라를 대표해 권한을 행사하라는 뜻이다.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하면서 입법부 위에서 입법부의 결정을 함부로 뒤엎거나 뛰어넘었다가는 곧바로 정치 공세에 시달린다. 유족들이 야당의 설득을 팽개치고 입법부의 합의를 외면한 뒤 대통령에게 달려가려는 것은 현행법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초법적(超法的) 결정을 해달라는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러 번 유족들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함께 단식을 하겠다는 응원단도 나타났다. 야당 대표가 협상 결과를 설명하며 단식 농성 천막 안에서 무릎을 꿇은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보도를 보면 협상 내용을 유족 대표들에게 설명하는 자리에서는 야당 대표가 부탁이나 간청보다는 일방 통보로 들릴 수 있는 말을 더 많이 들은 듯하다. 유족들 분위기가 어떤지 짐작할 만하다.

리원허 박사는 감옥에서 나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보상금 160만달러(약 16억원)를 받았다. 자서전도 썼다. '나의 조국 대(對) 나(My country vs. me)'에서 그는 자기 조국(祖國) 미국을 원망했다. 인종차별로 인해 스파이 누명을 썼다는 주장이었다. 판사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표해 사과했지만 그가 먼저 자기 국가를 등졌기 때문일까. 그는 여태 학교나 연구소로 돌아가고 싶은 뜻은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세월호 유족들이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못 믿겠다고 하는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의 법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맺은 계약서나 마찬가지다. 헌법은 국민투표라는 절차를 통해 전 국민이 직접 사인한 공동 계약서이고, 법률은 국회의원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간접 서명한 문서다.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권리 외에 나에게만 특별한 혜택을 달라고 대통령이나 입법부에 요구할 때는 다수 국민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대통령, 국회의원이 함부로 특정 집단, 특정 개인에게 법 밖의 권리를 주게 되면 공인(公認) 계약서를 찢고 자기들만의 계약서를 따로 작성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세월호 유족들이 야당을 통해 확보하지 못한 권리를 대통령 면담을 통해 확보한들 그 법이 국민 반대 여론에 부닥쳐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온 국민이 서명한 계약서를 깔아뭉개려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왔다. 전교조는 '법외(法外)노조' 판결을 받고서도 전임자들이 학교에 복귀하지 않는다. 많은 노조는 이면(裏面) 합의서를 통해 법을 뛰어넘는 특혜를 받았다. 이런 예외가 워낙 많다 보니 세월호 유족들도 그런 '법외(法外) 권리'를 바라는 듯하다. 모두 '넓은 의미의 정부'를 부정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싸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통령·국회를 상대로 하는 싸움에 골몰한 나머지 정작 계약의 당사자인 다수 국민과 싸우고 있는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23일자 A26면 만물상과 송희영 칼럼에 나오는 '국가 원수(元帥)'의 '元帥'는 '元首(원수)'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