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봉분 사이로 가야의 흙을 밟는다. 넓게는 지름 49m에 이르는 고분(古墳) 700여 기가 있는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작가 김훈의 역사소설 '현의 노래' 무대이자, 12줄 가야금을 만들었던 우륵의 나라다. 김훈이 고령의 낙동강을 만나는 개포나루에 이르러 자신의 책 한 대목을 낭송한다. "우륵은 개포나루로 말을 달려갔다. 대장간들이 문을 닫았고 나루터 군사나 허드레꾼도 보이지 않았다. 식은 화덕에서 매캐한 불 냄새가 풍겼다…. 신라 군대가 강 건너에 포진한 것은 확실했다."

지난 25~26일 고령 일대에서 올해 출간 10주년을 맞은 김훈 '현의 노래' 낭송 축제가 열렸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교보문고, 조선일보가 공동 주최하는 '길위의 인문학'이 올해 8차 탐방을 떠나 낭독 캠페인 '책, 세상을 열다'에 동참했다. 대구 연극협회 지회장을 맡고 있는 연극배우 성석배씨가 낭독자로 나섰다. 낭독회 주제는 '천년의 소리 대가야를 울리다'.

경북 고령에서 돌아오던 길, 우륵이 가야금을 탄 충주 탄금대(彈琴臺)에 들렀다. 김훈(오른쪽)이 함께한 낭송의 축제였다.

경기도 외딴섬 선감도 작업실에 틀어박혀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작가 김훈의 모처럼 나들이에, 독자들 반응은 뜨거웠다. 참가 신청 전제 조건이었던 독후감 제출은 평소 두 배 이상 폭증했다. 그중에는 이날로 예정됐던 팔 수술을 다음 주로 미뤘다는 이, 다음 날이 남편 생일인데 음식점 예약을 급거 취소하고 부부가 함께 왔다는 이도 있었다.

작가는 소년 시절 자신을 매혹했던 두 명의 영웅을 이야기했다. 하나는 '칼의 노래'를 쓰게 만들었던 이순신, 또 하나는 이날 주인공이었던 우륵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륵은 가야의 궁중악사까지 지낸 가야금 명인. 하지만 나라가 위태롭자 악기를 들고 신라로 도망친 배신자이기도 하다. 작가는 "조국을 버리고 적국으로 투항한 예술가의 이미지에 매혹당했다"면서 "그러면서도 가야금을 전수해 '가야'라는 이름을 후세까지 지켜낸 사람은 이 배신자가 아니냐"고 되물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아이러니를 입증하는 흥미로운 사례이기도 하다.

고령 대가야박물관에서 열린 강연과 낭송회는 말 그대로 경쾌한 축제처럼 치러졌다. 서울에서 내려간 70여 독자와 고령에서 마중 나온 70여 독자가 박물관 강당 150석을 촘촘하게 채웠다. 배우 성석배씨 외에 곽용환 고령군수를 포함한 서울·고령의 아마추어 낭송가들은 자신만의 수줍은 제스처 혹은 과장된 음색으로 폭염에 시달리는 고령에게 유쾌한 바람과 시원한 웃음을 선물했다.

1500년 전 가야는 철제 무기와 악기라는 극단의 문명이 동시에 태어났던 놀라운 땅이었다. 작가는 그 두 문명이 반드시 대척점이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세상을 변혁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현실적인 수단인 무기, 또 하나는 이전에 없던 찬란한 아름다움(예술)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 고령의 여름밤이 깊어갔다.